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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판촉물로 전락한 추억의 만국기

입력
2015.05.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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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의 한 재래시장 골목에 걸린 호객용 만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서울 중구의 한 재래시장 골목에 걸린 호객용 만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이들의 함성소리에 학교운동장이 들썩거린다. 새파란 하늘을 가르며 신나게 나부끼는 만국기. 지구상 어디쯤인지도 모를 나라들의 국기가 학교 운동장에 걸리는 날엔 어김없이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어린 시절 추억과 향수를 간직한 만국기가 최근 초등학교 운동회 대신 각종 상업시설의 호객용 장식으로 변질된 채 거리에 내걸리고 있다.

학교 운동장 위로 만국기가 빼곡히 걸린 운동회 풍경은 초등학교 운동회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임세훈 서울 양화초등학교 교장은 “과거엔 전체 조회와 같은 집단주의적 교육 문화가 강했지만 차츰 교육과정이 세분화 되면서 학년, 학급별 활동 위주로 변화하고 있다” 며 “운동회 역시 전교생이 한 날 한 번에 치르는 보여 주기식 행사에서 놀이 중심의 학년별 체육활동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운동회가 축제에서 놀이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서울 중구 거리에 내걸린 판촉용 만국기
서울 중구 거리에 내걸린 판촉용 만국기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콩주머니던지기… 신나는 운동회의 추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만국기가 걸린 풍경’이다. 사진은 몇 해 전 경기 파주시 대성동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장면.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콩주머니던지기… 신나는 운동회의 추억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만국기가 걸린 풍경’이다. 사진은 몇 해 전 경기 파주시 대성동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 장면.

학교 운동장을 떠난 만국기는 새로 개업한 점포나 가전제품 판매점, 통신사 대리점, 모텔, 주유소 등에서 손님의 시선을 끄는 장식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김모(33)씨는 “만국기를 걸어 둔지 한 2개월 됐는데 100미터 밖에서도 만국기를 보고 ‘할인행사 하느냐’고 찾아 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라며 만국기의 홍보 효과에 대해 만족해 했다.

학교 운동회 추억 간직한 만국기

이젠 신장개업 점포, 모텔 등서

시선끌기용 장식물로 사용돼

말 그대로‘시선강탈’용으로 채택된 만큼 만국기는 더 이상 꿈과 희망을 전하는 순수한 깃발장식이 아니다. 소박해 보이던 얇은 종이는 사시사철 사용할 수 있는 비닐 코팅 재질로 바뀌었고 금, 은 수술까지 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요란스럽게 햇빛을 반사한다. 대부분 점포 건물에서부터 인도를 가로질러 가로수나 가로등에 줄을 고정하다 보니 눈부신 반사광이 인도를 지나는 행인들의 시선을 끊임 없이 자극한다. 아예 고압선에 줄을 묶어 둔 경우는 전기 합선이나 화재 가능성이 커 매우 위험하다.

보행자들이 지나는 서울 은평구의 인도 위를 주변 점포에서 설치한 만국기 장식이 가로지르고 있다.
보행자들이 지나는 서울 은평구의 인도 위를 주변 점포에서 설치한 만국기 장식이 가로지르고 있다.
서울 중구의 한 점포 앞. 만국기 장식을 고압선에 묶어 고정해두었는데 만국기 재질이 은박지라서 합선이나 화재 위험이 매우 크다.
서울 중구의 한 점포 앞. 만국기 장식을 고압선에 묶어 고정해두었는데 만국기 재질이 은박지라서 합선이나 화재 위험이 매우 크다.

대학생 이승희(21)씨는 “심하게 반짝거리는 만국기 때문에 정신이 사납다. 만국기가 걸린 곳은 아예 시선을 바닥 쪽으로 고정하고 지나갈 정도“라고 말했다. 박종호(25)씨는 “업체를 홍보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랫동안 더럽게 방치된 만국기는 도시 미관상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길게는 4~5년 이상 장 기간 매달려 있다 보면 알록달록한 국기의 원래 색깔이 바래면서 국적 불명의 국기가 탄생하기도 한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의 본 뜻을 생각하면 회색 톤으로 변해버린 만국기의 모습이 마냥 우습지 만은 않다.

마구잡이로 설치된 만국기 장식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단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인도나 차도 위로 한 달 이상 걸어 놓은 만국기는 불법 적치물품으로 간주 되어 단속 대상이다”라면서도 “이로 인해 불편하거나 위험하다는 민원제기가 없어 만국기에 대한 단속은 아직 한 건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점포 앞에 걸어둔지 5년이 더 된 태극기 장식물. 빨간색이 옅은 핑크색으로 변해 국적불명의 국기가 되어 있다.
점포 앞에 걸어둔지 5년이 더 된 태극기 장식물. 빨간색이 옅은 핑크색으로 변해 국적불명의 국기가 되어 있다.

만국기는 일제의 잔재?

위키백과는 만국기의 유래를 “서양의 만국박람회장(런던, 1851년)에 장식된 기 장식을 일본이 모방하여 줄에 종이재질로 된 국기로 장식한 것이 개화기 또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도입 시기와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고종황제의 출어(임금이 궁궐을 나서는 일) 행렬에 만국기가 걸려 있는 사진이 대한제국 말기 이전에 이미 만국기가 전해졌음을 증명한다. ‘만국기’라는 단어는 한반도에 전해지기 전부터 일본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고종황제의 출어 행사에 만국기가 등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한제국 말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고종황제의 출어 행사에 만국기가 등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국기를 일제의 잔재라고 보는 배경에는 만국기의 유래가 일본이라는 점 외에도 만국기가 단골로 등장했던 운동회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국가적 행사였다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1874년 근대적 정신과 건강한 몸을 목표로 시작된 일본의 운동회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기병습격이나 장난감 비행기, 전차를 활용한 종목이 도입되며 ‘황국신민 양성’에 충실히 이용되었다(운동회-근대의 신체/요시미 슌야 외 지음/이태문 옮김/논형).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운동회가 열렸으며 여기에 만국기 장식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국기가 러일전쟁 등 전승축하 행사에서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벚꽃도 사쿠라도 봄이면 핀다/한수산/고려원). 해방 이후에도 전교생이 함께 청백전을 벌이는 일본식 운동회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지속됐고 만국기를 게양하는 문화도 함께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만국기'라는 표현은 일본어

일본식 운동회는 '황국신민 양성'용

그러나 세계 각국의 국기를 깃발로 장식하는 것 자체가 교육적 측면으로 볼 때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오히려 순수하게 바라보면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진취적인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만국기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쳤다고 해서 일본식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편협한 자세라는 생각도 기본 논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전교생 또는 마을전체가 참여하던 집단 운동회는 이제 학년별, 학급별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체육활동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일제 잔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추억과 향수가 젖어있는 만국기만 그 모양이나 취지가 변질된 채 거리의 판촉물로 전락한 현실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이명현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4)

화려한 만국기가 내걸린 서울 중구 거리.
화려한 만국기가 내걸린 서울 중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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