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소위, 멍 때릴 때. 다른 걸 볼 경우도 있지만 대개 빈 컵을 볼 때가 많다. 왜 굳이 컵인지 자문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난분분한 생각들에 지쳐있을 때 그러곤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고즈넉하게 가라앉는 걸 느끼게 된다. 둥글게 비어있는 공간. 그럼에도 그 바닥과 부피는 단번에 측량 가능한, 위압감도 막막함도 없는 공간. 뭔가로 채워지기 이전이거나, 채워져 있다가 비워진 공간. 그건 공간인 동시에 대상이고 대상인 동시에 허방처럼 보인다. 용적과 체적은 변화 없지만, 쓰임새에 따라 전혀 다른 용도로의 전환도 용이하다. 주로 물이나 음료 같은 액체가 담기지만, 흙을 부어 작은 식물을 키우거나 장난감 병정 따위로 요새를 만들 수도 있고, 밑에 바퀴를 달아 전차처럼 가지고 놀 수도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표면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 혼자 상상하는 세계, 이를테면 천공의 성 같은 걸 꾸며 천장에 매달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모든 생각들을 다시 걸러내 둥글고 깊게 비어있는 그 자체로 돌아가 탁자 위에 가만히 놓여있는 컵 하나. 그 둥근 공간이 누군가의 얼굴처럼 보인다. 거기 눈 코 입을 그려본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저 얼굴은 누굴까. 액체처럼 움직이고 기체처럼 사라지는, 내 한 순간의 고즈넉한 망념은 과연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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