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에 오뚝한 코. 주지훈의 외모는 현대적이다. 도포와 갓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2012년 사극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출연했을 때 대중들이 의아해 할만도 했다. 웃음을 앞세운 사극이었으니 그나마 덜 낯설었다고 해야할까.
어색함을 지울 수 없는데 또 사극이다. 게다가 조선 연산군 시대 폭정의 정치를 뒤에서 조정한 간신배 임숭재를 연기했다. 웃음은 한치도 찾을 수 없고 피와 살 냄새가 그득한 사극 한 가운데 모델 출신의 세련된 외모의 배우가 섰다. 이질감이 강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궁중암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색을 뚜렷이 드러낸다. 영화 ‘간신’의 개봉(21일)을 앞둔 주지훈을 12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시종 농담 섞인 답변으로 기자들을 웃기면서 난처한 질문을 피해갔다. 다음은 일문일답.
-두 번째 사극이나 이전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지난해 개봉한 ‘좋은 친구들’에 출연할 때는 기자간담회 등에서도 장난만 쳤다. 정통 사극을 하다 보니 촬영장에서도 진지했고 영화 관련 행사에서도 장난 칠 수가 없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함께 했던 민규동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췄다. 민 감독의 아내 홍지영 감독의 작품(‘키친’과 ‘결혼전야’)에도 지속적으로 출연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주변에 나를 (‘결혼전야’와 ‘키친’ ‘간신’ 등을 제작한) 수필름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민규동 홍지영 부부 감독이 계속 주요 배역을 맡기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와 ‘키친’은 동시에 시나리오를 봤고 둘 다 좋아 출연을 결정했다. 두 분이 부부이다 보니 민 감독님 만나면 홍 감독님이 보이고, 홍 감독님 만나면 민 감독님 뵙게 됐다. 자연스레 친해졌다. 영업수완이냐고? 나 영업수완 나쁘지 않다(웃음). 민 감독님은 아빠 같고 홍 감독님은 엄마 같은 느낌이다. 민 감독님은 이렇게 하라고 명확히 지시를 내리는데 홍 감독님은 이거 어떻게 해볼까라고 말한다. 민 감독님은 따라가면서 찍는다는 기분이 든다.
-실존 인물을 연기해서 부담은 없었나?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성을 강조하는 영화는 아니다. 전태일 같은 인물을 다루면 철저하게 고증해야 하나 이번에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는 왕의 눈을 볼 수 없었는데 ‘간신’에서의 임숭재는 연산군을 바라본다. 조금 더 영화적인 선택을 한 작품이라서 실존인물의 관계성에 영화적 캐릭터를 입혔다. 이런 영화일수록 제 생각이 안 들어간다. 정해진 틀에 많이 맞춰간 부분이 있다.”
-연산군을 연기한 김강우에 더 초점이 맞춰질까 신경이 쓰이지 않았나?
“아니다. 강우형은 커피라면 나는 차에 해당한다. 연산의 광기는 직접적인 인물로서 표현되고 숭재의 광기는 상황으로 표현이 된다. 미친 왕과 미친 시대를 만드는 간신이니까 숭재의 광기는 영화 전체에 녹아 들어가 있다.”
-주지훈의 재발견이라는 말도 나온다.
“또? 그런 말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동안 흥행이 안 돼서 재발견이라고 그러나? 누군가 그러더라. 배우가 매 작품 재발견 소리 들으면 좋지 않냐고. 난 단호히 아니라고 했으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간신’을 출연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민 감독님 집을 스스럼 없이 드나든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봐왔다. ‘결혼전야’ 촬영할 때쯤에 민 감독님이 전화해서 ‘너 내 다음 작품 할래?’라고 물어서 하겠다고 답했다. 평소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결정하니 다른 감독 분들은 섭섭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에는 민 감독님 영화라 해도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결정하지 않으려 한다. 128개 장면이나 찍었다. 민 감독님 서울대 출신이라 그런지 역시 머리가 좋다. ‘결혼전야’ 촬영 중에 출연을 물어보면 누가 거부하겠나(웃음).”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받으면 뭔가 쓸 수 있게 해드려야 하는데… 사실 힘들었다고 생각 든 적이 없다. 많은 배우들이 오디션 200번 떨어졌다고 우는데 난 그게 배우의 기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이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노출이 많은 영화인데 영화를 보며 야하다는 생각은 안 했나?
“훨씬 노골적인 노출 장면이 많았는데 편집이 됐다. 영화 촬영에 참가한 사람이라 그런지 아주 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연산군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나지 않았나?
“시나리오를 본 뒤 아주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산군을 해보겠다고 말할까 살짝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 대신 다른 역할을 했을 때 짊어질 짐이 더 커진다. ‘정신 차리자’며 임숭재에 전념키로 마음 먹었다(웃음).”
-등장인물들의 광기가 많이 발산되는 영화인데 촬영장 분위기도 진지했을 듯하다.
“진지했다.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시대를 그리는 작품이라서 미술적인 장치가 많이 필요했고 찍어야 하는 장면도 많았다. 촬영 현장이 정신 없이 돌아갔다. 민 감독님은 가벼운 농담 정도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배우는 을이고 감독은 선장이다. 내가 괜히 분위기를 풀려고 하면 쟤는 왜 집중 안 하냐고 말하는 감독이 있고, 진지하게 있으면 쟤는 왜 저리 딱딱하냐고 지적하는 감독이 있다. 그래서 배우는 카멜레온이 돼야 한다. 그런데 직장인들도 다 똑같지 않나? 그게 인간관계이고 사는 재미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탈춤을 추는 장면이 있는데 직접 췄나?
“아니다. 3개월 동안 춤 연습을 했는데 나중에 아예 다른 안무가 나와서 직접 하지 못했다. 예전에도 8개월 동안 무용을 배워 준비한 영화가 있는데 제작이 이뤄지지 못했다. 내가 춤이랑 인연이 없나 보다. 그래도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굉장히 매력을 느낀다. 춤에 소질은 없다. 원래 나처럼 키 큰 사람은 노래도 힘들고 춤도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비나 유노윤호 등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노출 장면이 많은 영화를 찍을 것에 대해 연인인 가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무런 관심을 표시하지 않다니) 아, 억장이 무너진다. 아, 위경련 온다. 가인도 이제 나이가 28세다. 낭랑 18세도 아닌데 기분이 나쁠 리는 없다. 각자의 꿈이 있는 것이고 꿈을 채워 가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노출 심한 영화 찍었다고) 싸우거나 뭐라 말하면 못 만난다(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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