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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守令七事와 국민연금

입력
2015.05.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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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해 나갈 때 국왕 앞에서 외워야 하는 일곱 가지 사항이 있었다. 수령 7사(守令七事)라고 하는데, 첫째가 농상성(農桑盛)으로 농사일과 누에가 잘 자라도록 하는 일이고, 둘째가 호구증(戶口增)으로 인구를 늘리는 일이고, 셋째가 학교흥(學校興)으로 교육을 진흥시키는 일이다. 넷째는 군정수(軍政修)로 군사관계 정사를 잘 닦는 일이고, 다섯째가 부역균(賦役均)으로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는 일이다. 여섯 번째는 사송간(詞訟簡)으로 소송을 간소하게 처리하는 일이고, 일곱째가 간활식(奸猾息)으로 아전들의 농간을 막는 일이었다.

수령 7사는 외우고 돌아서서 잊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근무실태를 평가하는 고과(考課)조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각 도의 감사(監司)는 1년에 두 번, 음력 6월 15일과 12월 15일 이전에 소속 지방관의 업적을 조사해서 중앙에 보고하는데, 이를 전최(殿最)라고 한다. 최하(最下)가 ‘전(殿)’, 최상(最上)이 ‘최(最)’였는데, 성적이 우수한 상고(上考)와 중간인 중고(中考), 하등인 하고(下考)로 나눴다.

고봉 기대승이 쓴 ‘정 교리(鄭校理)의 제문’에 “산수 좋은 고을에서 편안히 지내며/ 오직 어버이를 받들려고 했는데/ 고과에서 끝내 중고를 맞아/ 집에서 가난하게 지냈다”는 구절이 있다. 중간 성적인 중고를 맞아도 쫓겨났을 만큼 그 평가가 엄격했다. 그러니 1년에 두 번씩 고과를 받아야 하는 고을 원님의 신세는 그리 편하지 못했다. 불시에 암행어사가 들이닥쳐서 조사하는 것도 결국 수령 7사였다. ‘춘향전’에 나오는 것처럼 기생을 가지고 다투는 변학도 같은 사또가 나오기는 그리 쉽지 않은 구조라는 말이다.

여기에 흉년이 들면 수령은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를 황정(荒政)이라고 한다. 세종이 재위 4년(1422) 흉년이 들자 시신(侍臣)들에게 “매일 황정에 관한 일을 최우선으로 보고하라”고 말한 것처럼 국왕이 매일 직접 챙겼으므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조의 ‘황정 12사(荒政十二事)’는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열두 가지 일을 싣고 있다.

첫째가 파종할 씨앗이나 먹을 곡식을 빌려 주는 산리(散利), 둘째가 세금을 줄여 주는 박정(薄征), 세 번째가 형벌을 완화해 주는 완형(緩刑), 네 번째가 부역을 줄여 주거나 면제하는 이력(弛力), 다섯 번째가 금지한 것을 일시 풀어 주는 사금(舍禁), 여섯 번째가 시장에서 세금을 걷지 않는 거기(去幾), 일곱 번째가 예법을 간편하게 하는 생례(?禮), 여덟 번째가 상례(喪禮)를 간편하게 치르는 쇄애(殺哀), 아홉 번째가 악기를 창고에 넣어두는 번악(蕃樂), 열 번째가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게 하는 다혼(多昏), 열한째가 잊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주는 색귀신(索鬼神), 열두 번째가 도적을 없애는 제도적(除盜賊)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해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황정 12사’는 흉년이 들면 굶주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총력전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황정을 다른 말로 혜정(惠政)이라고 한다. 은혜로운 정사라는 뜻이다. 운종가(雲從街ㆍ종로)에 혜정교(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세종 16년(1434)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혜정교 동쪽에 두고 다른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지한 사람들도 시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는 궐 밖에 나갔다가 환궁할 때 혜정교에 나아가 여러 차례 죄수들을 재심해 석방시켰다. 죄수 석방도 혜정이란 뜻이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인상을 둘러싼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1,702조 세금폭탄론’ 같은 ‘숫자 놀음’ 와중에 청와대와 정부, 여야의 주장이 모두 달라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한 그릇 밥과 국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는다 할지라도, 호통치면서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지 않고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더럽다고 여긴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꾸짖으면서 발로 차면서 돕는다는 뜻의 호축(?蹴)이란 말이 나왔다.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나 국민연금 숫자 놀음 등 현 정권에서 국민연금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호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했던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士小節)’에서 ‘굶어 죽을지라도 호축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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