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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희망은 사치가 아니다

입력
2015.05.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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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주체 청년' 부정하는 신조어들 남발

희망은 절망적인 현실 이겨 내는 치유제

그를 통해 세상 새롭게 보고 만들어 가야

최근 한국사회에 청년층을 ‘5포세대’ (연애, 결혼, 인간관계, 출산, 내 집 포기)’라고 지칭하는 자조적인 신조어가 마치 당연한 진리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달관세대’ ‘절망세대’ 또는 ‘5포세대’라는 신조어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조어들은, 다양한 개성과 상이한 인생관을 지닌 무수한 개별인들에게 ‘복수(複數)의 표지’를 붙이면서, 자조적 패배주의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단적 표지는 청년 개별인들 사이의 다양성과 상이성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총체적으로 단일화시킴으로서, 한국의 모든 청년들을 ‘고정관념의 상자’속으로 집어넣는 기능을 하고 있다. ‘자포자기 하는 청년들’이라는 표상을 담은 신조어들은, 자신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치열하게 모색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변화의 주체자로서의 청년들’의 존재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배제한다.

청년들을 ‘5포세대’라고 규정해버리는 이러한 비관적 분위기 속에서 ‘희망’은 사치스러운 말로 들릴지 모른다. 공허한 희망의 강조는 이 척박한 현실세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투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염려가 앞 설 경우이다. 그런데 ‘낙관’할 수 없다고 하여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다. 처절한 절망과 무의미성의 삶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낙관’과 ‘희망’의 차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낙관’이란 ‘사실적 수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희망’이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 우정, 정의, 평화 등과 같이 인류를 지켜온 ‘소중한 가치’들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불가시적 가치들을 수치화하여 사실적 자료로 전환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칸트가 던진 네 가지 중요한 질문중의 하나이다. 희망이란 암흑처럼 느껴지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 인간을 살아남게 하는 ‘치유제’가 되어왔다. 반면 ‘왜곡된 희망’은 인간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희망이란 ‘위험의 위로자’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칸트는 ‘희망해도 되는가’라고 물음으로서 희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모든 희망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타자들을 짓밟고서라도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는 이기적 탐욕과 욕망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객관적 수치들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려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희망함’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지니며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구성하는 가치를 향해서 ‘나’를 맡기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희망함’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있게 하는 ‘필수적 요청’이며,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향하여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서 함께 밝혀 나가야 할 소중한 삶의 촛불이다.

희망의 촛불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보는 눈을 새롭게 형성해가야 한다. 무수한 ‘이름없는 별’들이 모여 아름다운 행성계를 이루는 세계로 작은 걸음이라도 내 디딜 수 있는 것이다. 가슴속 깊이에 ‘희망의 촛불’을 지닌 이들에 의해서, 연애, 결혼, 인간관계의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연애관, 결혼관, 인간관계관이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우리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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