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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진단명

입력
2015.05.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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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룩한 표정의 중학교 남학생이 진료실에 부모님과 함께 왔다.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살을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메시지로 남겼다고 한다. 친구들이 깜짝 놀라 아이에게 달려 갔고 아이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울면서 말했다. 부모님의 충격은 더 컸다. 단지 사춘기라서 집에 와도 방안에 혼자 있고, 남자라 무뚝뚝해서 대화도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면담에서 아이는 항상 “무기력”하다고 했다. 일에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챙겨야 했던 아이는 줄곧 어른 역할을 했다. 학교에서도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적었다. 기쁨도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잠도 푹 잘 수 없고 친구들이 잘해주어도 겉도는 느낌이었고 집에서는 인터넷 게임만이 위안을 주었다고 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다는 말을 듣고 부모님은 오열했다. 아이들을 위해 힘든 상황에서 노력했는데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아픈지 몰랐다고 고통스러워했다.

병원에 오기 전에 부모님도 아이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두세 달이 지나도 아이의 모습은 비슷했다. 시간이 지나니 부모님도 지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의지가 약하다. 마음만 다르게 먹으면 달라질 수 있는데 왜 노력하지 않느냐? 엄마 아빠도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다.” 아이의 열리는 마음 문은 다시 닫혔다.

지금 아이의 상태가 무기력한 우울증이고 이런 모습은 괴로움이 누적되어 생긴 ‘병’이라는 것을 말하면 어른들은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오히려 아이는 이해한다. 내 마음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어른들은 의지만으로 안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가 ‘우울증’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아이들의 정서행동 문제에 우리는 의학적인 진단을 내리는 것에 아직도 거부감이 많다. 특히 진료실에서 보면 아이들의 우울증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받아들이는 것을 특히 힘들어한다. 최근 한 매체에서 ADHD가 만들어 낸 가짜 질환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보도해 진료를 받고 있던 아이와 부모들이 상처 받았고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 평소 믿을 수 있다고 자부한 방송이나 언론 프로그램에서 가끔 부적절한 내용이 과학적 근거 없이 보도될 때는 속상하다.

정서 행동에 대한 관찰과 다양한 과학적 데이터가 축적되는 부단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의학적 진단으로 이름을 붙인다. 진단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낙인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과학적으로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아이들의 우울증에 대해 인정한 것도 불과 50년 전이다. 어른들의 생각으로 아이의 모습을 보니 아이가 어떻게 우울증을 겪을 수 있냐고 생각한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에는 공격적이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자제력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1970년대부터 뇌기능과 관련하여 과잉행동과 충동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에 대한 인지기능, 뇌영상, 유전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책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0년대에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모두 종합하여 ADHD라는 이름을 정해, 증상들이 분류가 가능하고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주는 상태이고 의학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어떤 경우든 중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과 환경의 도움이다. 그러나 아이가 힘들어 하는 것을 단순히 아이의 게으름이나 의지부족, 또는 부모님이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진단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잘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한 과학적 노력의 결실인 것이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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