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엘리트 직장인의 변신, 돌연 사표 던지고 남극으로
7대륙 최고봉 최단기간 등정… 172일 만에 올라 기네스북에
자신만의 스타일 따라 등반, 좋아하던 안데스 오르다 숨져
마터호른을 비롯한 알프스 거봉들을 야금야금 ‘정복(peak-hunting)’한 세계(사실상 유럽)의 산악인들이 등정 대상지를 광역화하고 나선 게 대략 19세기말부터다. 각 대륙 최고봉과 극점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신의 영토가 아니라 미등 미답의 매혹적 도전무대였다. 히말라야의 8,000m급 거봉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저 악명 높은 낭가 파르바트(8,126m)가 타깃이 된 것도 1895년 6월이었다. 바로 그 도전에서 ‘머메리즘(Mumerrism)’이라는 현대 알피니즘의 등뼈에 이름을 남긴 영국 산악인 앨버트 머메리(1855~1895)가 숨졌다. ‘머메리즘’은 능선이 아니라 벽을 타고 정상에 오르는 머메리 특유의 등반 방식을 일컫는 말에서, 정상 정복의 결과 지향적 등정(登頂)주의에 맞선 등로(登路)주의 즉 루트의 개척성과 난이도 일반을 중시하는 등반 방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멀루트가 닦여야 더 험난한 루트의 도전도 가능한 일이다. 못다 채운 등정의 갈망 앞에서 머메리즘과 알파인 스타일은 긴 세월 이상이고 사치였다. 1920년대 아이스 폴과 산소호흡기 등 획기적 등반 장비들이 등장했고 영국이 에베레스트 첫 탐사 등반대를 파견한 것도 그 무렵(1921년)이었지만, 8,000m 죽음의 지대에 인류가 실질적으로 닿은 것은 1950년대부터라고 해야 한다.(1922년 조지 맬로리 팀과 조지 핀치 팀이 각각 에베레스트의 8200m, 8300m 고지까지 나아갔지만 등정에는 실패했다.) 안나푸르나(50년)- K2, 초오유(54년)- 캉첸중가, 마칼루(55년), 로체, 마나슬루, 가셔브룸II(56년)- 브로드피크(57년)- 가셔브룸I(58년)…. 저 잇단 초등 성공의 드라마들 속에 산소통과 포터 없이 이뤄진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57년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브로드피크 등정이 유일했다. 알파인 스타일과 머메리즘은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초등한 이후, 또 불과 석 달 뒤 낭가 파르바트를 메스너 혼자 무산소로 등정한 이후 비로소 현실적인 규범이 됐다. (참조: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이용대, 마운틴북스)
서두가 장황해진 것은 지난 3월 24일 안데스 산맥의 설빙에서 실종됐다 4월 3일 시신으로 발견된 인도의 등반가 말리 마스탄 바부(Malli Mastan Babu, 향년 40세)의 삶의 좌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6년 7대륙 최고봉을 2006년 단 172일 만에 등정한 산악인이다. 남극 빈슨 마시프(1월 19일)- 남미 아콩카과(2월 17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3월 15일)- 호주 코슈즈코(4월1일)- 아시아 에베레스트(5월 21일)- 유럽 엘브루스(6월 13일)- 북미 매킨리(7월 10일). 그는 늘 혼자 다녔다. 예약하고 신고하고 짐 싸고 이동하는 번다한 일들을 감안하면 숨돌릴 새 없는 강행군이었을 것이다. 그의 기록은 7대륙 최고봉 최단기간 등정으로 월드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세계 등반사와 산악인들의 기억에 영예롭게 남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7대륙 최고봉 초등정은 1985년 미국인 딕 베스가 이미 이룬 기록이다. 사실 베스의 기록조차 이듬해 로체봉 등정으로 인류 최초의 8,000m급 14좌를 완등한 메스너의 기록으로 금세 빛이 바랬다. 7대륙 최고봉이라곤 하지만 8,000m급은 에베레스트가 유일하다. 바로 아래가 6,000m급 아콩카과(남미)와 매킨리(북미)이고, 호주의 코슈즈코봉은 백두산보다 낮은 2,228m다. 이듬해인 87년 폴란드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1948~1989)가 두 번째 14좌 완등에 성공하면서 14좌 완등 경쟁이 본격화했다. 그리고 한 켠에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머메리즘과 알파인 스타일에 대한 지향이 선명해졌다. 바부의 저 등정 기록은 14좌도 모자라 16좌를 운운하는 마당에, 심지어 그 같은 등정 경쟁을 은근히 얕잡는 분위기 속에 나온 거였다.
바부는 혼자 등반했을 뿐 필요할 땐 산소 장비를 서슴없이 썼다. 드러난 행보로만 보자면 그의 등반 스타일은 기록 지향, 목표 지향적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낡은 패션과 후진 스타일의 등반가였다.
그렇다고 등반가로서 그의 행로가 안전하고 평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 설맹(雪盲)의 위험을 감수하며 고글을 벗어야 했던 적도 있고, 눈사태를 만나 조난 위기에 내몰린 적도 허다했다. 모든 전문 산악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거의 매번 목숨을 걸고 산에 올랐다. 다만 그 목표가 가장 뜨거운 도전 무대가 아니었다.
말리 바부는 1974년 9월 3일 인도 남동부 안드라프라데시 주 한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 중 정규 교육을 받은 이는 그가 유일했고, 그의 학업 성적은 탁월했다고 한다. 인도 국립기술연구소(NIT)를 거쳐 인도공대(IIT)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3년간 직장 생활을 한다. 직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캘커타 인도경영연구소(IIMC)의 2년 과정 전문관리인 교육을 받는 혜택까지 누린다. 그는 전도 양양한 엘리트 직장인이자 집안의 대들보였다. 하지만 2004년 교육을 이수하고 직장에 복귀한 그는 동료들이 연봉 협상에 여념이 없을 때 돌연 사표를 던지고 배낭을 짊어진다. 그리고 2년 뒤 남극으로 떠난다.
그의 체력은 가히 경이로웠다. 7대륙 최고봉 등정 이듬해인 2007년 10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 인도의 각기 다른 주에서 14일 연속 하프마라톤을 완주했고, 그 해 말에는 13일간 10개 주를 돌며 8번의 풀코스 마라톤과 3번의 하프 마라톤을 뛰었다. 2008년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칸첸중가에 이르는 1,100km 히말라야 트레인을 여러 고봉들을 넘어가며 75일만에 트레킹했고, 에베레스트에서 카일라시 봉에 이르는 2,000km 트레킹 코스를 132일만에 주파하기도 했다.
인도 영자신문 ‘데칸헤럴드’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누빈 여러 산 가운데 남미의 산, 특히 안데스의 고봉들이 가장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안데스의 6,000m급 14개 고봉 모두를 오르겠다는 게 그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안데스를 통해, 그 산의 정상들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2011년 말부터 시작된 그의 남미 등반 리스트에는 파라과이나 우루과이의 해발고도 1,000m도 안 되는 산들도 포함돼 있다. 콜롬비아 시에라 네바다 산군의 크리스토발 콜론(5,776m)을 오를 땐, 등반에 걸린 시간보다 지역 인디오들을 설득하는 데 더 긴 시간을 들이기도 했다. 인디오들은 크리스토발 콜론이 신의 거처인 만큼 외지인의 접근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그를 배척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도 인도의 인디오로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다며 그들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낸다.(인디아 뉴스, 2012.6.1) 아무도 알아줄 리 없지만, 어쩌면 그는 크리스토발 콜론을 정복한 첫 산악인일지 모른다.
대개 혼자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던 그에게 언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고 묻자 그는 “세계의 모든 산들은 모두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봉우리가 높든 낮든 그가 가면 반기고 마음과 영혼을 열어 그를 안고 힘을 준다고, 그 친밀한 교감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혼자 등반하는 걸 좋아한다고. (7대륙 등정 직후 다른 인터뷰에서는 혼자 등반하는 이유를 “내 속도를 따라오는 이를 찾기 힘들어서”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그 즈음 독학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해 주민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등 남미 여러 나라의 인도 대사를 역임한 비스와나탄이란 이는 자신의 블로그에 “바부는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지형과 풍경 기후에 매료됐다. 라티노의 온화하고 관대하고 매력적인 품성을 사랑했고,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과 교유하면서 마치 고향에 있는 듯한 행복감을 맛보곤 했고, 그들과 라틴의 음악과 춤을 즐겼다”고 썼다. 어느 날 비스와나탄 대사가 독신인 그에게 왜 라틴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느냐고 묻자 바부는 겸연쩍어하며 “사실 그 여성들의 마력에 저항하려면 산과 같은 단호함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조금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산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내겐 더 올라야 할 산이 있다”고. 비스와나탄의 글은 이렇게 맺는다. “그는 허공을 응시했는데 내겐 그가 트랜스 상태에 든 듯했다. 그는 이미, 마음 속으로는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바부는 안데스 14좌 가운데 페루의 후아스카란(6,768m), 볼리비아의 사자마(6,542m), 에콰도르의 침보라조(6,310m), 칠레의 오조스 델 살라도(6,800m)를 올랐고, 다음이 6,749m의 네바도 트레스 크루세스(Nevado Tres Cruces)였다. 3월 23일 등정을 시작한 그는 24일 악천후에 실종됐고, 수색팀이 그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열흘 뒤인 4월 3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교정에 선 우다이 바스카르 라오(Uday Bhsakar Rao, 인도군 중위로 1985년 인도군의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이끌다 숨졌다.)의 동상을 보며 등반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바부는 대학 시절 여러 개의 상을 탔는데 대부분 체육과 야외활동을 주도하며 교내 여가활동을 다채롭게 한 공로였다고 한다. 그는 IIMC에서 공부하던 2003년 교내 ‘어드벤처 클럽’을 설립하기도 했다.
인도는 극지 탐험ㆍ등반의 후발국이고 바부 이전에 이렇다 할 등반가를 배출하지도 못했다. 그의 등반 기술은 사실상 독학으로 익힌 거였다. 인도의 산악 영웅이 된 그는 자신의 등반 경험을 섞어 기업인 등을 상대로 경영 리더십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산들을 누볐다. 명성을 얻은 뒤 그의 모교와 몇몇 기업들이 등반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등반가로서 그는 예지 쿠쿠츠카와 닮은 면이 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공학도의 집요함으로 늘 혼자서 루트의 변수와 등정 전략을 점검했지만, 7대륙 최고봉 등정 기록에서 엿보이듯, 최적의 날씨를 기다리고 최선의 루트를 고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쿠쿠츠카는 메스너가 16년 만에 해낸 14좌 완등을 절반인 8년 만에, 그것도 10개봉은 신루트 개척 등반이었고, 4개봉은 메스너가 시도한 적 없는 무산소 동계 초등이었다. 메스너가 오랜 알피니즘의 전통 속에서 교육받고 여러 후원 업체의 지원 속에 등반한 반면 쿠쿠츠카는 가난한 조국 폴란드가 지원한 허술한 장비와 다른 팀이 버린 장비로, K2등정 때는 돈을 아끼려고 다른 팀에 빌붙어 입산 허가 없이 올랐다가 뒤늦게 벌금을 물기도 하면서 이룬 성과였다.
바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폴란드 출신의 또 한 명의 산악 영웅 보이테크 쿠르티카도 떠올려야 한다. 14좌 완등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쿠쿠츠카에게 쿠르티카가 했다는 말.“미터를 피트로 환산하면 8,000m는 2만 6,240ft다. 2만6,000ft급 봉우리는 27개나 된다. 2만6,000ft급 레이스는 왜 안 벌이는지 묻고 싶다. 숫자놀이나 기록들을 수집하는 일은 알피니즘이 아니다.”(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319쪽) 등반사의 가장 도드라진 머메리즘의 구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되는 쿠르티카는 동료 등반가 로버트 샤워와 함께 1985년 당시 가셔브룸 IV(7,925m) 서벽 루트 초등에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서벽을 넘은 뒤 정상을 불과 수십 미터 남겨둔 채 하산한다. 이용대 씨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상까지의 행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상 등정이 등반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서벽에서 체험한 극한 등반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할 수 있었다”고 썼다. 그의 평가처럼, ‘극한 등반’을 추구했던 쿠르티카는 저 미등의 신화로 하여 등정의 영광보다 더 눈부신 영광을 누리고 있다.
바부는 자신이 산에 오르는 까닭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한 적이 없다. 그는 정상의 고독과 교감의 기쁨을 멋지게 표현했지만, 그게 다일 수는 없다. 어차피 목숨을 걸었으면 더 높고 가파른 봉우리의 ‘검은 고독 흰 고독’(라인홀트 메스너의 낭가파르바트 단독등정기 제목)은 왜 마다했는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누가 뭐라 하든 알아주든 않든 끌리는 대로 산을 택했고, 그의 스타일로 올랐다. 그 길이 육체와 정신의 극한을 요구하면 안간힘으로 순응하면서 그 너머의 정상을 동경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극한’이 아니라 그냥 ‘산’이었고 정상이었다.
어쩌면 그는 등정주의도, 쿠르티카가 목숨 건 등로주의도 초월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기록으로 뻐기는 것도, 굳이 어려운 루트를 선택해서 정상 앞에서 돌아서는 것도 그로선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목표를 추구하는 것만큼 과정의 난도를 추구하는 것도 인간 한계에의 도전 다시 말해 자기애의 한 변형일 뿐, 산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 게 바부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진실이 저 안데스의 ‘이름 없는’ 설빙 속에 묻혔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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