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초기 중단편 15편 모아 출판
노벨상 단골 후보에도 작년 첫 선
공산당·인종차별 등 가차없이 비판
단어·문장 반복 실험적 글쓰기도
오자·매끄럽지 못한 번역 '옥의 티'
동유럽 문학을 소개할 때 ‘숨은 걸작’ 혹은 ‘흙 속의 진주’ 같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건, 동유럽 작가들이 은신을 즐겨서가 아니라 냉전이 문학에 남긴 몹쓸 흔적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공산주의 체제 하에 놓였다가 1989년 공화국으로 체제전환을 이룬 헝가리를 비롯해 동유럽권의 소설은, 아시아 특히 한국처럼 냉전의 중심에 놓였던 국가들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독자들이 나더쉬 피테르란 작가를 놓쳤다는 건 더 없이 통탄할 일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나더쉬의 소설이 국내에 번역되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이미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가 올해 73세가 된 것을 생각하면 나더쉬의 한국 상륙은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미노타우로스’는 나더쉬가 첫 장편소설 ‘The End of a Family Story’(1977)를 펴내기 전, 초기에 주로 썼던 중·단편 소설 16편을 모은 것이다. 한국 출판사에서는 이중 중편 ‘세렐렘’을 지난해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이번에 이를 제외한 열 다섯 편을 묶어서 냈다. 작가가 20~30대에 쓴 이 작품들에는,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2차대전의 유대인 대학살, 헝가리 공산화, 1956년의 반 공산당 혁명,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자살까지 청소년기에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섬세하게 투영돼 있다.
작가가 22세 때 쓴 ‘성경’은 헝가리가 공산화된 후 한 고위급 공산당원의 가정을 무대로 한다. 당에서 각자 한 자리씩을 차지한 부부와 이제 막 남성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소년의 집에 시골 출신의 17세 소녀가 가정부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나님이 아닌 ‘여성 동무’라고 부르라는 주인과 십자가 목걸이를 건 가정부의 대립을 통해, 작가는 공산당 집권이 전통 헝가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를 비판적 시각으로 포착한다.
‘새끼양’은 한 마을에서 유대인 남성이 겪는 차별을 그렸다는 점에서 자전적 성격을 띤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 차별의 욕구를 숨긴 변두리 마을에서, 한 유대인 남성이 당으로부터 공원 관리자로 임명되며 갈등이 시작된다. 절대권력을 지닌 당원들과 옷깃이라도 스치려고 혈안이 된 마을 사람들은, 당의 ‘성은’을 입은 유대 남성을 향해 이전과는 다른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위 작품들을 포함해 상당수의 소설에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사건을 조명하는 눈으로서만 소년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페니스의 힘에 휘둘리기 시작한 괴랄한 종족으로서 그 특성을 가감 없이 묘사해, 소년, 남성, 나아가 인간 전체에 대한 서늘한 혐오를 드러낸다.
연도순으로 배열된 작품들을 따라 읽다 보면 중간쯤 수록된 ‘생체해부’부터 나더쉬 특유의 실험적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1968년에 쓴 이 작품을 기점으로 전통적인 소설 집필 방식을 버리고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 긴장감을 유발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시도했다. 이는 표제작인 ‘미노타우로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요셉과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로 구성된 성(聖)가족을 등장시킨 이 소설은 기독교에서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추앙하는 예수를 반인반수(半人半獸)로 묘사해 발표 당시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소설의 대부분이 여성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만으로 구성돼 희곡인지 소설인지 불분명한데, 작가는 자서전에서 이 작품을 자신이 완성한 “첫 번째 시”라고 평했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만으로도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정작 나더쉬를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 놓은 작품은 ‘A Book of Memories’(1986년)와 ‘Paralle Stories’(2005년)다. 각각 998쪽, 1,524쪽인 방대한 분량의 이 책들에 앞서 나더쉬라는 작가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입문서가 이번 소설집이다.
오자와 군데군데 매끄럽지 못한 번역은 옥의 티다. “헝가리어가 허용하는 한계치까지” 문장 실험을 밀어 붙이는 나더쉬의 성향을 차치하고라도 주어와 술어가 조화롭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아쉬움을 자아낸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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