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일 박상옥 대법관 후보가 임명제청 됐다는 대법원의 보도자료를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검사, 변호사, 국책연구기관장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험과 넓은 안목을 축적했다” “대법원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아우르며 최고 법원으로서 본연의 헌법적 사명을 다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사법부를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변인실에 전화를 해서 박 후보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아우를 것’이라는 근거는 뭔지 물었다. 검사 시절 어떤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다던가, 어떤 주제의 논문을 냈다던가, 변호사 시절에는 어떤 변론을 하고 판례 형성에 기여했다던가. 어정쩡한 답변을 들어보니 별 근거 없이 넣은 문구로 확인됐다(하기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박 후보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수사 검사였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하니까).
대법관 다양화를 말할 때 참 단순한 접근법들이 많다. 서울대 출신뿐이라고 하면 고려대 출신을 한 명 집어넣고, 남자뿐이라고 하면 여자를 한 명 집어넣고, 법관 출신뿐이라고 하면 검사 출신을 한 명 집어 넣는 식이다. ‘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엘리트 법관 위주’라는 주제가 대법관 구성을 비판하는 진부한 레퍼토리이니, 답안도 진부하기 그지 없다. 물론 다양화를 외적인 요소에서 찾는 것은 형식(출신)이 내용(정신)을 강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취지에서이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서울대 출신보다는 비서울대 출신이 약자의 입장을 더 잘 알 것이라는 추정은 평균적으로 볼 때 일리 있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아서, 곱게 자라 책밖에 모르는 샌님 같은 남성이 바닥에서 출발해 혼자 힘으로 성공한 여성보다 더 약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있지 않나.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2명의 여성, 2명의 비서울대 출신 대법관이 있지만, 통상임금 등 일련의 판결에서 약자 편에서 가장 소수의견을 많이 낸 대법관은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의 남성인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이다.
그러니 대법관 다양화의 기준은 ‘출신’이 아니라 ‘성향’이어야 한다. 이점은 현재의 대법원이, 그리고 대법관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이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인복, 이상훈 대법관은 진보성향으로 분류되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에 임명됐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의 임명자는 김신 대법관 정도가 그나마 다양화의 형식과 내용에 부합하는 편이다. 그는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가 있다.
판사들은 보수 혹은 진보 인사로 분류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만 어쨌건 각종 시국사건, 노동사건, 국가 상대 손해배상 판결 등에서 성향은 엿보일 수밖에 없다. 보수 정권이 두 번 이어지며 14명(대법원장, 법원행정처장 포함)의 대법관, 여기에 더해 9명의 헌법재판관은 이미 80,90%가량 보수적 인사들로 채워졌다. 최고법원의 판결이 권리를 침해 당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편으로 치우칠 때 사회는 야금야금 병들게 마련이다. 누가 봐도 정권이 싫어할 주요 판결을 내렸던 한 고위법관은 “승진 욕심 내면 이런 판결 못해요”라고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차기 대법원장을 임명하게 된다. 대법원장의 임명제청으로 대법관이 임명되는 것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이 사법권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가 물러난 뒤에도 6년(대법원장 임기)간 지속되는 셈이다.
현재의 대법관, 헌법재판관 임명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정권에 ‘자비’라도 바라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전쟁터의 총과 칼을 투표용지로만 바꾼 게 아니라면 승자의 통치는 좀 더 너그러워야 한다고. 한 명의 대표자를 뽑을 때는 51%에게 진 49%가 패배자이지만, 14명의 대법관을 뽑을 때는 49%를 패배자로 만들 이유가 없다. 부디 5,6명 정도는 ‘루저’들을 위한 몫으로 할당해주시길.
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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