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포겔(하버드대)ㆍ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교수를 비롯한 세계적 역사학자 187명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왜곡의 중단 및 사실 인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과 유럽, 호주 등지에서 동양근ㆍ현대사나 일본사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해 온 이들이 입을 모아 일본의 역사왜곡을 지탄하고 나선 것은 처음으로, 지구촌 지식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부를 전망이다.
이들은 그제 ‘일본의 역사가들을 지지하는 공개서한’이라는 성명을 통해 “수많은 여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붙잡혔고, 끔찍한 야만 행위의 제물이 됐다는 증거는 분명하다”며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일관성 없는 기억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이들이 제공한 전체 기록은 설득력이 있고, 공식문서와 병사 등의 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 성명을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 초 미 역사협회(AHA) 소속 역사학자 19명이 성명을 통해 미국 역사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을 수정하려던 일본 정부의 시도를 규탄한 바 있다. 당시에 비해 이번 집단성명은 참여학자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데다 쟁쟁한 권위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구미의 손꼽히는 일본 전문가들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지적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 특히 역사 왜곡에 앞장서 온 일본 관변 보수학계와 보수 언론에 보낸 공개 경고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집단성명과 2월의 AHA 성명 모두가 일본 진보사학계에 강한 연대 의식을 표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아베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역사 정당화 및 과거사 그늘 지우기를 위한 보수학계의 목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일본의 진보사학계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외쳐왔다. 지난해 12월 역사학연구회를 비롯한 일본 역사학계의 4개 진보학회는 위안부 문제의 왜곡 시도를 비판한 역사학연구회의 성명을 계기로 ‘4자 협의회’를 구성, 일본 정부와 보수파의 역사 왜곡을 세계에 알리고 밖으로부터의 영향력 행사를 요청하는 활동을 해왔다. 이번 공동성명은 이들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번 성명이 일본 정부나 보수파의 역사인식 자체에 어떤 변화를 부를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가 ‘종전 70주년 총리 담화’등 공식 언행에서 지금까지 예상보다는 다소 진전된 역사인식을 담을 가능성은 있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물론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기 어렵게 됐다. 일본 정부는 한중 양 국민과 세계의 지식인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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