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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겸손하지 맙시다

입력
2015.05.0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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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에 올라가는 연극 시작 파티가 있었다. 연출이니 이런 저런 말로 분위기를 띄우고 배우와 스태프들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당연히 했던 공연이고 늘 하는 것이라 무슨 말을 또 해야 하나 싶지만 막상 닥치고 보면 할 말이 또 생긴다. 올해도 역시나 할 말이 있었다.

겸손하지 말자고 했다. 올해로 5년째 하는 공연인데 이번이 마지막이다. 공연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름다울 때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다. 스물다섯 살이 서른이 되고 서른다섯 살이 마흔 살이 되었다. 연극계에서는 이러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극단의 레퍼토리도 아니고 19명이 출연하는 나름의 대작인데 그것도 한 곳에서 해마다 같은 시기에 올라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나. 그래서 우리는 늘 일년 전에 스케줄을 통지하곤 했었다. 이제 이 공연은 내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겸손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흘려 들으면 참 괘씸한 망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름의 겸손이 숨어있다. 그 궤변을 감히 늘어놓겠다.

우리는 보통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의 업적을 숨기고 자랑을 해도 될 것을 자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의 인격이 훌륭하다며 칭송해 마지않는다. 그런데 알고 보면 약간의 꼼수가 숨어있다. 겸손을 가장하여 스스로를 더 높이려는 의도가 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닌 경우가 하나 있다. 자기 스스로가 내세울 게 없다고 정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다. 그것 말고는 대체로 가짜인 것 같다. 어울려 사는 사회이다 보니 적당한 체면치레는 해야겠고 그래서 의례적으로 겸손을 사회생활의 미덕으로 교육받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겸손은 이미 겸손이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를진대 어찌 겸손이 되겠나.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곧장 도마 위에 올라간다. 교만한 사람을 다들 싫어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리액션을 하기도 곤란하다. 겉으로 인정이나 수긍을 해야만 분란이 안 생긴다. 저 잘하죠? 하면 그래 너 잘한다 할 수 밖에 없다.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해야, 아니야 잘했어 하면서 대화가 변증법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더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겸손은 이제 좀 식상하고 재미가 없다. 내 경우에는, 누군가가 저 잘하죠? 하면 리액션이 곤란한 게 아니라 먼저 웃음이 나온다. 웃기는 자식이네 이러면서 느닷없이 정이 간다. 사이가 진지해지지 않아진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금방 진지해지고 멀어진다. 한 번 더 말을 해서 거룩하게 수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겸손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자기가 잘 했다고 믿어지면 그냥 잘했다고 하면 된다. 다른 행간이 필요가 없다. 자기가 못했다고 생각되면 그냥 못했다고 하면 된다. 그게 본질이고 제대로 된 진술이다. 판단은 상대가 할 일이다. 나는 그저 사실만 진술하면 된다. 아닌가.

지난 4년 동안 늘 만끽을 유보하라고 주문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연극이라고 매회 최면을 걸었다. 그런데 올해는 암만 생각해도 겸손해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이라서가 아니다. 5년째 체화된 역할이 꽤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 하나하나가 존재감을 가지고 말을 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디렉션을 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연극을 즐길 따름이다. 이미 마지막 시즌이라는 아쉬움과 긴장감이 무대에 서는 그들을 순수하게 만들고 있다. 더 이상 겸연쩍어하며 겸손을 가장한 가면으로 사실을 왜곡할 까닭이 없다.

민망한 말이지만 우리 배우들이 자랑스럽고 경외스럽다. 이것이 진실인데 대관절 어쩌란 말인가. 웃기는 자식인 걸 어쩌란 말인가. 가만 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거나 솔직하지 않다. 가끔은 안 그래도 된다. 대견해하시라. 거침없이 만끽하시라. 푸르른 날 아닌가.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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