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난리 끝에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물러났지만 정부부처들이 밀집한 세종시엔 아직 ‘이완구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 이 전 총리가 공직기강 다잡기 차원에서 시작한 공무원들의 복무실태 단속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총리 대행(최경환 부총리)조차 지난주 첫 국무회의에서 “모든 공직자의 흐트러짐 없는 근무태세 유지”를 재차 강조한 걸 보면 당분간 큰 변화도 없을 것 같다.
흐트러짐 없는 근무자세가 공직기강의 기본이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어 보인다. 다만 ‘흐트러짐’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는 한 번 따져봤으면 한다. 지금 벌어지는 복무실태 단속 풍경이 씁쓸함을 넘어 허탈감마저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요즘 세종시의 점심시간은 흡사 피난행렬을 연상시킨다. 허가된 외출 시간(당초 오전 11시30분까지는 눈감아 주던 것이 최근엔 11시45분 정도로 더 빡빡해졌다)에 맞춰 우르르 몰려 나온 공무원들은 오후 1시 직전 다시 사무실로 떼지어 돌아간다. 정해진 식사시간을 지키라는 ‘암묵적인’ 지침 때문이다. 정작 이번 단속의 주체인 국무조정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우리는 1시를 얘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벌어지는 현실은 그렇다.
공무원들에겐 점심 밥상에서 수시로 시계를 살피는 버릇도 생겼다. 상가와 멀리 떨어진 사무실 직원은 그나마 가까운 정부청사 건물로 들어가 공중 연결통로로 이동하는 꼼수도 쓴다. 출입카드에 찍히는 시간이 중요해서다. 오죽하면 ‘1시 신데렐라’라는 자조 섞인 유행어까지 생겨났을까.
출장이 잦은 사람에겐 내역서까지 내라고 하는 통에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 오후에 서울에서 회의가 끝나도 굳이 세종시까지 내려왔다가 카드를 찍고 다시 서울로 퇴근하는 촌극도 빚어진다.
졸지에 감시 대상이 된 공무원들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단속 얘기가 나올 때마다, 대놓고 욕은 못해도 “우리가 무슨 중고등학생도 아니고…”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억울해도, 위에서 하라면 따르는 게 몸에 배인 공무원의 자세지만 속마음까지 굽신거리긴 싫은 모양이다.
애초 이번 단속은 출장을 핑계 삼아 서울과 세종시 모두에서 업무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운, 이른바 ‘사라진 김 과장’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과장처럼 ‘기형적인 이원(서울ㆍ세종) 근무’의 허점을 교묘히 활용하던 일부 공무원들에겐 이번 단속이 따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이른바 스마트정부 시대 아닌가. 거창한 정의까지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앞선 온라인ㆍ모바일 기반을 이용해 시간ㆍ장소에 구애 받지 말고 창의력을 십분 발휘해 보자는 게 쉽게 풀자면 스마트정부이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경제의 단면일 텐데, 시간 맞춰 사무실에 드나드는 지 살피는 ‘자리지키기’ 식의 복무태도를 유도하는 단속이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는다.
정부는 스마트정부를 표방하며, 서울과 세종청사 곳곳에 화상회의 시스템도 갖춰 놓았다. 역시 그 자체로, 위치에 관계없이 업무에 충실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요즘 이 화상회의 시스템의 이용률이 저조한가 보다. 정부가 생각한 해결책은 의무사용 할당량을 정해주는 것. 현장에선 출장 갈 일이 별로 없는 공무원마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옆자리 동료와 화상채팅을 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지만 공무원들의 이런 ‘스마트’한 대응을 윗분들은 아시는지 궁금하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으려면 사회 각 분야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연일 부르짖는 정부다. 공직기강도 결국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몇 시에 사무실을 드나드는지 보다 주어진 임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시대착오적인 복무기강을 강요하는 자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이를 따르는 자, 이들이 구현할 스마트정부와 창조경제에 국민들은 무얼 기대할 수 있을까.
김용식 경제부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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