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연이 친구 유호정의 며느리를 처음 본 자리에서 짓궂은 시험을 해보려고 갑자기 영어로 질문한다. 시어머니에 대해 말해 달라고. 그러자 똘똘한 며느리 고아성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창한 영어로 답한다. “She is overwhelmingly beautiful”이라고.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유호정은 정말이지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이름만으로 브랜드가 돼버린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드라마다. 기득권 계층을 비꼬는 블랙코미디, 장면 하나하나에 담긴 제작진의 내공 등등 골수팬들이 할 말이 너무나 많은 드라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주변의 아줌마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 말을 꺼내면 십중팔구 이 말부터 한다. “야야, 유호정 정말 너무 예쁘지 않냐!!!!”
안판석 감독님과 정성주 작가님에게 죄송하지만, 나 역시 그렇다. 이 콤비의 전작 ‘밀회’에서는 김희애가 여주인공이었고, 김희애 역시 세월을 거스르는 미모로 유명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땐 김희애의 아름다움보다는 물광 메이크업이 더 기억에 남았다.(미안합니다)
그런데 유호정은 일단 존재 자체로 아줌마들의 드라마 몰입을 방해할 지경이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깔끔한 커트단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옷을 입었을 때 나오는 그 길고 가녀린 라인을 어떻게 할거냐는 말이다. 가늘고 긴 다리를 드러낸 원피스에다가 군살 하나 없는 어깨에 걸쳐만 놓은 재킷은 엘레강스 그 자체다. 아줌마들이 상주하는 모 카페 게시판에는 드라마가 끝나면 유호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글,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는 한숨이 줄을 이어 올라온다.
이 드라마는 상류층을 비꼬면서도, 동시에 그 상류층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중산층 이하 계층의 속물 근성도 비꼰다. 상류층에 붙어 살면서 뒤에선 그 상류층을 욕하는 이들도 비꼬는 것 같고.
가끔 유호정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제작진은, 유호정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생활인의 때가 전혀 묻어있지 않은 듯한 그 모습)을 부러워하는 현재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모습을 비웃기 위해 유호정을 저리도 아름답게 등장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드라마를 떠나서 ‘46세 여배우 유호정’을 보면서 드는 엉뚱한 생각도 있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고아성이나, 또 다른 드라마인 ‘냄새를 보는 소녀’에 나오는 신세경 같은 20대 여배우를 압도할 정도로 유호정이 예뻐 보이니, 이래서 대한민국에 20대 여배우 기근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영화나 드라마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서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토론 주제가 하나 있다. 1991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리메이크한다면, 과연 윤여옥 역할(채시라)을 지금 누가 할 것이냐는 주제다. 대부분 결론은 ‘대체할 배우가 없다’는 쪽으로 내려지고, 그나마 공감을 얻는 배우는 하지원 정도다. 하지만 하지원도 나이가 벌써 30대 후반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찍을 당시 채시라가 스물 셋이었다.
눈에 띄는 20대 여배우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내 멋대로 분석해 봤다. 20대 초반 인기 여배우들, 혹은 20대 때 인기를 얻었다가 30대로 진입한 배우들이 연기 발전 없이 정체되는 게 가장 문제다. 연기가 늘지 않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가 아닌가 싶다. 인기가 높아지면 곧바로 광고 시장을 휩쓸고, 아무래도 광고 모델로 이미지가 묶이다 보면 배우로서 연기 변신을 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좁게 가둬버리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냥 돈을 너무 많이 벌기 때문에 연기가 잘 안 느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예전에 ‘무릎팍 도사’에 나왔던 윤여정이 고백하지 않았던가. “배우가 연기를 가장 잘 할 때가 언젠지 아느냐. 바로 돈 필요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라고.
환경 탓도 있다. 요즘 20대 여배우들은 인터넷 악플, 초고화질 TV 때문에 역사상 가장 많은 에너지를 외모 관리, 성형에 투자해야 한다. 관리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 예전엔 40대 여배우면 로맨스 주인공이 되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관리 잘 한 40대 여배우에게 20대가 밀릴 판이다.
게다가 요즘 영화나 드라마 제작 환경은 또 어떤가. 일단 제작비 뽑아내려면 중국 같은 해외권에 수출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몸값 비싼 ‘한류 스타’를 섭외해 놔야 투자가 성사된다. 과거와 비교해서 20대의 신선한 여배우가 굵직한 배역으로 캐스팅되기 쉽지 않다. 1990년대 심은하가 ‘마지막 승부’ 다슬이에서 ‘청춘의 덫’ 윤희까지 과정을 거쳤다면, 요즘 여배우들은 다슬이 역할을 잡기도, 그 이후 윤희까지 변신하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까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풍문으로 들었소’ 이야기를 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풍문으로 들었소’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여배우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나, 결국은 다 돈이 문제다. 돈이.
<풍문으로 들었소>풍문으로>
SBS 매주 월, 화 밤 10시 방송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 ‘한송’의 대표인 한정호(유준상)와 최연희(유호정) 부부는 최상류층 가족을 대표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의 아들이자 고등학생인 한인상(이준)이 임신한 여자친구 서봄(고아성)을 데려오고, 이들은 결혼까지 감행한다.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갑질’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갑’과 ‘갑’의 싸움구경을 한 번 지켜보자고 소개하고 있다.
★시시콜콜 팩트 박스
1. ‘안판석-정성주 사단’의 배우들이 이 드라마에서도 크고 작은 배역으로 총출동한다. 대부분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다진 배우들로, 양 비서 역할의 길해연은 올해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다. 유호정의 개인비서 이선숙으로 나오는 서정연이 ‘밀회’에서 김용건 회장님을 ‘엿 먹이는’ 조선족 아줌마 역할이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나는 서정연이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 친엄마 도씨로 나온 배우인 줄 알았다.(미안합니다)
2. 서봄의 언니 서누리 역할로 나오는 배우 공승연은 실제로 고아성 보다 한 살 많다.
3. 이 드라마 이전에 장기하의 ‘풍문으로 들었소’ 노래가 인상적인 배경음악으로 나온 드라마는 ‘응답하라 1994’였다. 고아라의 친구들이 ‘마산 재벌들’과 미팅을 하는 코믹한 장면이다. 건달 아저씨 스타일의 남자들이 카페 문을 열고 슬로모션으로 들어서면, 카메라가 이들을 쭉 훑으면서 이 노래가 나왔다. 어쨌거나 이 노래가 나온 드라마는 다 인상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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