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면식 없는 대학입학 동기생의 죽음이 컸다.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 이후, 세종로에서 무장 해제된 페퍼보그 차에 올라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친구의 모습이 9시 뉴스 화면에 포착됐었다. TV를 시청하던 부모님 눈에 덜컥 걸려버린 녀석은 2대 독자. 얼마 후, 6개월 방위를 다녀오고선 시위현장에서 발을 끊었다. 시인이 되던 해, 서태지가 등장했고 느닷없는 은퇴식 다음 날, 탈영과 항명 충동으로 점철된 꼴통군인 신세를 마감했다. 남해 바다와 서울을 오가는 부랑 생활이 이어졌고, 연애의 정답 없음과 이별의 무한한 쓰라림에 간장병과 편두통으로 화답했다. 동쪽에서 밥 먹고 서쪽에서 잠들고, 남쪽에서 술 마시고 북쪽 보며 눈물 흘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국가 부도가 발생했을 때엔 학점 부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학생도 학생 아닌 것도 아닌 낭인이 되어 지하철역 주변을 떠돌았다. 비디오방에 틀어박혀 ‘영화삼백사무사’의 경지를 이루려 했으나, 돌아오는 건 만성 기침과 요통뿐. 영화 같은 인생 따위 없었고, 내 인생을 대변해줄 영화도 만나지 못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만년 야당이 집권했고, 콧수염 단 네덜란드인이 이끄는 오렌지 축구단에게 참패하는 한국 축구를 보며 붉고 푸른 유니폼 색깔의 서글프고 촌스러운 보색 대비에 환멸도 느꼈다. 붉지도 푸르지도 못한 청춘이 손가락 사이로 새고 있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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