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의 흥분 에너지 더불어
경기장의 중요 동력원은 전기
1,498개의 메탈할라이드등
그라운드의 공·선수·잔디 돋보이게
야구 재미 더하는 전광판 데이터들
덕아웃의 결단과 용기 분노 등
데이터화 할 수 없는 요인들과 함께
경기를 이끌고 나가는 힘

오늘날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시스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결정과 행위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운동경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이 무대 뒤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 편의 오페라가 상연되듯이, 운동경기도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 이루어진다. 야구경기가 펼쳐지기 위해 어떤 요소들이 움직여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잠실야구장을 찾아갔다. 기대했던 대로 거기에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설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전광판은 저절로 정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리 프로그램을 짜놓고 차례대로 클릭해야 하고, 조명탑은 저절로 켜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기를 모니터링해야 불을 밝힌다. 그 모든 시스템들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야구경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야구장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보면 두가지 동력원이 필요하다. 하나는 관중의 에너지, 또 하나는 전기다. 야구장은 항상 흥분에너지로 넘쳐난다. 심지어 경기가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흥분의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다. 선수들도 환호하며 흥분하는 관중들 덕분에 힘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야구장의 모든 부분에 흥분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장은 흥분하는 부분과 흥분하지 않는 부분으로 돼 있다. 흥분하는 부분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라운드와 관중석, 덕아웃 등이다. 관중들은 항상 흥분해 있다. 그들이 야구장에 오는 이유는 흥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때때로 흥분하지만 대체로 흥분하지 않는 편이다. 호쾌한 홈런을 날리고도 묵묵히 무표정으로 베이스를 도는 타자나 몸을 날려 환상적인 호수비를 해놓고도 내가 언제 뭘 했느냐는 표정으로 다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수비수를 보면 멘탈 스포츠라는 야구가 참 냉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구장에서 늘 흥분하지 않는 부분은 대개 관중석 아래에서 경기를 이끌고 가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시설과 인원들이다. 대회본부, 구단사무실, 경기감독관실, 방송실, 응급구조사실, 심판실, 사진기자실이 그것이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계처럼 잘 작동하기에 야구가 진행된다. 진짜로 순수한 기계는 지하실에 있다. 전기실이다. 전기실은 잠실야구장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시설 같아 보인다. 야구에는 대체가능한 요소들이 많다. 선수가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바꾸고, 감독이 퇴장 당하면 코치가 대신 지휘하고, 아나운서가 목이 아파서 말을 못 하게 되면 해설자가 대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전기다. 전기는 끊어지면 다른 수단으로 대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기시설은 제일 깊숙한 지하에 숨어 있다. 야구장에서 쓰는 전기는 3,300볼트의 산업용이다.

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끊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이야 정전이 아주 드문 일이 됐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 1970년대만 해도 정전이 참 흔했다. 그래서 가정마다 양초가 꼭 비상용으로 있었다. 위중한 수술실에서처럼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지만 야구경기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린 일이기 때문에 전기가 나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잠실야구장은 2013년 4월에 경기 도중 정전이 된 후로 정전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돼 있다. ‘Flywheel UPS’라는 간판이 붙은 방이 그 핵심이다. UPS란 Uninterruptible Power Supply, 우리말로 하면 비상전원장치 정도 되겠다. 플라이휠 비상전원장치는 고속으로 회전하는 플라이휠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하여 만일의 사태에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이다. 원리는 이렇다. 플라이휠은 평소에 전기를 공급받아 항상 돌고 있다. 잠실야구장의 거대한 플라이휠 UPS도 계속해서 윙윙 소리를 내며 돈다. 갑자기 전원이 나가도 플라이휠은 관성력 때문에 여전히 돈다. 그러면 플라이휠에 연결된 발전기가 작동하여 전원을 공급한다.

야구장에서 제일 전기를 많이 소모하는 것은 조명이다. 대부분의 프로야구경기가 평일 저녁 6시30분에 시작되기 때문에 조명을 켜는 것은 필수적이다. 잠실야구장에는 1,498개의 메탈할라이드등이 있고 각 등의 전력소비량은 1,500W다. 다 곱하면 2,247㎾가 된다. 50W 형광등을 4만4,500개 켤 수 있는 전력이다. 4월 초에 시작된 정규 리그가 끝나고 마지막 남은 팀들이 결승전을 벌이는 이른바 가을야구 때가 되면 잠실야구장의 환한 조명은 단순히 전기불 많이 켜놓은 것이 아니라 불나방을 부르는 불꽃같이 빛난다. 조명을 받은 공은 우주공간에 떠 있는 행성처럼 희게 빛나기 때문에 눈에 잘 띄고, 잠실야구장을 덮고 있는 켄터키 블루 그래스 잔디는 밤에 색이 더 짙어지기 때문에 공이 더 잘 보인다. 선수가 던지는 밤의 야구공은 광선검처럼 일직선으로 꽂힌다. 거기서 야구선수의 근육과 유연성과 판단력이 혼합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경기를 진행하는데 전기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지만 그 힘을 조절하는 것은 정보다. 야구장의 종합정보센터는 방송실이라 할 수 있다. 야구장에서 선수들 다음으로 관중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 전광판일 텐데, 거기 뜨는 정보를 조정하는 것이 방송실의 컴퓨터다. 방송실의 컴퓨터에는 전광판에 표시할 온갖 메뉴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선수들의 이름은 기본이고 중간중간 틀어줄 음악의 곡목, ‘홈런’이나 ‘합의판정 중’ 같은 경기진행에 관련된 문구에서부터 ‘파울볼 주의’ ‘소지품 제한’ 같은 주의사항까지 온갖 자잘한 정보들이 표시돼 있다. 상황에 맞게 그 정보들을 디스플레이해야 한다. 이런 정보는 경기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재미이기도 하다. 관중들은 전광판에 바뀐 투수 이름을 보고 환호하기도 한다.

야구는 데이터의 스포츠라고 한다. 타율이 얼마고 방어율이 얼마고 하는 기본적인 수치 외에도 OPS(출루율과 장타율의 합)니 ERA(평균 자책점)니 WHIP(이닝 당 안타?볼넷 허용률)이니 하는 복잡한 수치들이 등장하면서 수치를 따지는 것도 야구를 보는 재미의 일부가 되고 있다. 타자의 출루율도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역전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특정 투수를 상대로 한 출루율 등 조합하기에 따라 무한대의 데이터가 나올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그런데 덕아웃에는 전자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게 돼 있다. 핸드폰, 노트북 컴퓨터, PDA 단말기 다 안 된다. 만일 덕아웃에 앉아 있는 감독이 PDA단말기를 보면서 데이터에만 의존하여 경기를 지휘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결단과 용기, 분노와 환희 등 데이터화할 수 없는 요인들이 감독의 인간적 매력이면서 경기를 이끌고 나가는 힘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야구라는 일은 은근히 인간과 데이터, 혹은 기계와의 힘겨루기이다. 사실 몇해 전부터 심판의 오심이 문제가 되면서 비디오 화면에 의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란이 있었다. 비디오 화면에 의존하면 심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었다. 그래서 심판의 권위도 떨어트리지 않고 오심에 대한 논란도 줄이기 위해 2013년부터 비디오 화면을 이용한 합의판정이라는 제도가 쓰이고 있다. 감독이 합의판정을 요청하면 심판실에 있는 중계화면을 보며 판단한다. 흥미로운 점은 합의판정을 위해 방송화면을 그대로 쓴다는 것이다. 그 덕에 방송사는 합의판정이 있을 때마다 긴장한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그 순간의 영상이 없거나 잘 못 잡아서 판정에 도움이 안 될까 봐 진땀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울트라 슈퍼 슬로우 카메라 3대, 슈퍼 슬로우 카메라가 1대 배치돼 있어서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 매의 눈 덕분에 합의판정이 가능하다. 이 고성능 카메라들은 넓은 야구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과의사처럼 정밀하게 들여다 보며 미세한 동작을 잡아낸다.

이렇게 보면 기계와 사람의 싸움에서 기계가 승리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야구는 결국 사람이 한다. 어느 투수의 구속이 시속 156㎞로 전광판에 찍혔을 때 관중들은 “우와~” 하면서 흥분했다. 하지만 그 투수는 제구력이 안 좋아 2군으로 내려갔다. 그에게는 공으로 156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으로 인간인 타자를 상대하여 이기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리적인 능력에서 인간과 기계의 대결은 1776년 증기기관이 발명됐을 때 이미 판가름났다. 작은 연필깎이든 막강한 제트엔진이든 기계는 다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기계문명이 인간의 역할을 많이 대체한 요즘도 여전히 근육을 써서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인기 있는 이유는 기계에 의해 점령당한 신체를 되찾으려는 욕구가 아닐까? 야구선수의 궁극적인 상대는 기계인지도 모른다.
글ㆍ사진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