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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꿈속에서의 한가함

입력
2015.05.0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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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흥야매(夙興夜寐)라는 말이 ‘시경’에 나온다.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각고의 노력을 해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 말을 들지 않더라도 다들 너무 열심히 사느라 잠을 옳게 자지 못한다. 잠을 푹 잘 수 있는 세상이 낙원이라는 생각도 든다.

19세기 양주(楊州) 땅에 살던 서생은 젊어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 해당(海堂)이라는 호를 쓰는 조병황(趙秉璜)이라는 사람이 그 재주를 아껴 시를 가르치고 근실하게 학문을 익히도록 권했다. 하루는 그 서생이 잠이 부족하여 한낮이 되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조병황은 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주었다. “죽음은 천년의 잠이요 잠은 하루의 죽음이다. 이로서 미루어본다면 백년 인생이라는 것은 오십년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잠을 잘 수 있는데도 자지 않는다면 오십년 인생으로 백년 인생을 살 수 있다.” 서생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학문에 나아가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세월이 빨리 갈까 겁을 내고 학업이 무너질까 두려워하였다. 낮에는 촌음을 아끼고 밤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자지 않아 오십년 인생을 백년 인생으로 살고자 했다.

조선의 선비들도 공부를 위해 잠을 줄이고자 했다. 한유(韓愈)가 ‘진학해(進學解)’에서 이른 대로 등잔불을 밝혀 낮을 이으면서 항상 곳곳이 앉아 한 해를 보내려 했다. 허벅지를 찌르고 약을 삼켜 잠을 줄이려 했다. 혹 깊은 잠이 들까 하여 사마광(司馬光)처럼 공 모양의 나무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오십년 인생을 백년 인생으로 만들면 사람이 행복해질까? 오히려 백년 인생을 꿈꾸다가 건강을 잃어 오십년 인생도 살지 못할 것이요, 설사 그렇게 된다 한들 무엇이 남겠는가? 그런 인생이 즐거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만용(李晩用)은 자신을 갈수한(渴睡漢), 곧 실컷 잠잘 수 있기를 바라는 사나이라 하면서 조병황의 말을 부정하였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하지 않다면 오십년 인생이 백년 인생의 근심을 가지게 될 것이요 백 년 인생이 천년 근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오래 살수록 근심만 많아지니 오래 사는 것이 그다지 달가울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만용은 “사람이 세상에서 근심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는 것은 햇수가 정해져 있으니 근심 없이 죽은 자는 거의 없고 죽은 다음에야 근심이 없는 법이다”라고 했다. 역사에 이름을 드리운 성인과 영웅도 평범한 사람에 비하여 손색이 있으니, 그것은 세상을 얻고 이름을 남기려 근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마음이 한가하고 몸이 편안한 평범한 사람은 오히려 그 삶이 행복하다. “나는 천하의 즐거움이 오직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한 것뿐이다.” 이것이 이만용이 ‘매변(寐辨)’이라는 글에서 제시한 답이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창흡(金昌翕)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벗을 위로하는 글에서 “하늘은 늘 낮이기만 하고 밤이 없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사람은 늘 움직이기만 하고 쉬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조물주가 밝음과 어두움을 나누어 일어나거나 잠자는 마디를 만들어 둔 것이다. 자고 일어나는 것을 바꾸면 기괴해지고 밤과 낮을 똑같이 살면 병이 든다. 군자는 어두울 때 쉬어야 한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 성취한 사람이라면 이만용이 말한 대로 잠을 푹 자서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한 삶을 누리도록 권하고 싶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해야 꿈도 편안하고 한가하다. 이만용은 “대개 하루 안에 어떤 때는 슬퍼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울고 어떤 때는 웃으며 어떤 때는 놀라고 어떤 때는 겁을 낸다. 그러한 일은 잠이 들면 문득 쉬게 된다. 그러나 달사(達士)가 아닌 사람이라면 잠을 잘 때 평소의 생각이 꿈으로 나타난다. 꿈에서 어부는 물고기를 보고 나무꾼은 땔감을 본다. 배고픈 자는 밥 먹는 꿈을 꾸고 부자는 재물을 얻는 꿈을 꾸며 신분이 높은 자는 좋은 수레를 타는 꿈을 꾸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는 고향집에 돌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이 모두가 그 즐거움을 좋게 여기는 것이지만 끝내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평시에 욕심이 없어야 꿈에서도 한가할 수 있다. 꿈속의 나조차 부귀영화에 얽매여야 하겠는가?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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