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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입력
2015.05.0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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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일본 도쿄 히토쓰바시(一橋)대학 강당에서 ‘동아시아 출판인회의’가 열렸다. 한중일과 대만, 홍콩의 몇몇 출판사들이 모여 십 년 넘게 계속된 지역과 문화를 넘는 ‘독서공동체’를 꿈꾸는 모임이다.

동아시아 지역은 ‘독서공동체’였다. 예를 들어 천자문은 중국의 고전에서 핵심을 추려 시적 언어로 쓴 책이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 같이 읽혔다. 양나라 때 주흥사가 만들었다 하나 많은 사람들이 편집했을 것이고, 왕인 박사가 일본에 전했다는 것을 봐서 우리나 일본에 오래 전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공통된 문화 텍스트이자 지식과 문화의 연대를 만든 자산이다.

이번 주제는 ‘전자독서의 가능성-동아시아 독서공동체 창출은 가능한가’였다. 전자책과 독서공동체가 어떤 연관이 있을까 궁금했다. 바야흐로 전자책 시대가 왔다 하여, 전세계가 부산스럽고 발 빠르다. 그렇지만 일본은 다른 IT환경처럼 한국보다는 발이 늦어서, 전자서적 역시 우리보다 늦게 태동했다 한다. 일본 출판계에서는 2013년을 전자출판의 원년이라 하며, 시장규모는 1,000억엔(8,900억원)대로 서적 총매출 7,500억엔(6조7,400억원)의 약 13%를 차지하고 아마존이나 라쿠텐(樂天)에 제공하는 타이틀 수는 30만여 점에 이른다 한다.

일본의 몇몇 출판 관계자와 대학교수 등이 한 그룹이 되어 전자책으로 ‘열려 있고 획기적인 독서의 방법’을 시험했다는 발표가 주목 받았다. 이들은 전자서적으로 ‘독서공동체’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고 책을 PDF로 만들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전자책 역시 다양한 포맷 속에서 조금씩 EPUB로 수렴되고 있고, 이 전자책은 필요한 부분에 강조선을 긋거나 모르는 어구를 사전으로 찾아보는 정도의 작업이 가능할 뿐, 더 열린 ‘복사&붙이기’ 등의 개인적 에디팅을 제한하고 있다. 이는 저작권 관리 목적이 크므로, 기술로 저작권 관리를 해결할 수 있다면 온갖 짜깁기와 편집을 통한 ‘독서행위’에는 어떤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를 시험해본 것이다.

물론 종이책에도 밑줄을 긋고 따로 메모를 하지만 이는 개인적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전자책의 특성을 살려 여러 명이 텍스트를 같이 읽고 각자의 ‘밑줄’과 ‘인용’ ‘감상’ ‘주석’ 등을 공유한다면 개인의 독서행위가 공동의 독서로 층위가 바뀌는 동시에 새로운 텍스트로 창출된다는 말이다. 즉, 전자책으로 종이책이 실현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유의미한 독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며 독서의 층위를 넓히는 한 방법일 뿐이다. 서울대 서경호 교수는 발표에서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의 지적 활동의 모델은 변하지 않았다’며 정보를 통해 지식을 창출하고 지식을 활용해 사유를 형성한다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리고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순으로 변한 SNS는 긴 텍스트에서 점차 짧아지거나 혹은 문자가 최소화되며 이미지와 동영상이 주를 이루게 된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소통하는 데는 매우 빠르고 효율적인 반면 그것들이 성취해야 할 ‘사유’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는 뜻이다.

맞다. 우리가 오랫동안 문자와 책을 사랑했던 이유는 정보와 지식을 소통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사유를 돕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문자와 책에는 인간의 방대한 경험과 사색이 정밀하게 녹아 있어 표피적인 지식과 감흥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울러 모든 감각과 경험과 지식을 근거로 상상하고 사유하며 체계화 혹은 통합함으로써 모든 정보 세계의 뼈대의 지위를 갖는다. 진화에는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진보는 명확한 태도를 요구한다. 사리를 판단하고 취사를 결정하는 잣대를 갖지 못한다면 그 변화는 퇴보일 수도 있다.

한성봉 도서출판 동아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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