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수혜자 日의 '헌신적 기여' 주장은 과거사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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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수혜자 日의 '헌신적 기여' 주장은 과거사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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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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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결과물인 8억弗 지원은

현금 형식이 아닌 日 생산물ㆍ용역ㆍ기술도 포함돼

자금 도입도 日 승인 절차 받으며

실질적 청구권자 권리 행사 못해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2월18일 청와대에서 정일권 총리(왼쪽에서 세 번째), 이동원 외무부장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김동조 주일대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일조약 제협정의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달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으로 점철된 과거사에 대해선 얼렁뚱땅 넘어가면서 오히려 일본이 자본과 기술을 ‘헌신적으로’(devotedly) 쏟아 한국 대만 중국 등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고 주장해 공분을 샀다. 아베의 언급은 일본이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달리 말하면 일본의 ‘청구권’ 자금과 공적개발원조(ODA) 덕분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아베의 주장은 물론 일본의 경제적 기여를 강조함으로써 과거사를 묻어버리겠다는 본말전도의 궤변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아베가 말한 일본의 경제적 ‘기여’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일본의 경제적 도움과 이를 토대로 한국의 산업화가 크게 진전됐다는 점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경제지원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에 대한 정치적 타협으로서의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등 5억달러로 설명되지만, 이 외에도 일본은 한국의 요청에 따라 1990년까지 상당한 규모의 각종 공공차관과 민자 투자를 지속적으로 투입했다. 구체적으로 일본은 해외경제협력기금을 통해 1966년부터 1990년까지 92건 5,962억엔의 엔화 차관을, 1969년부터 1983년까지 33건 27억엔의 해외 투융자를 각각 한국에 제공했다. 이들 엔화 자본은 특히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기간산업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돼 한국의 산업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 같은 일본의 경제협력은 어디까지나 경제와 냉전의 논리로써 과거사를 봉인한 이른바 ‘1965년 체제’의 대가로 이뤄진 것이었다.

● 일본 승인 거쳐 들어온 ‘청구권’ 자금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결과 한국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신용 3억달러 이상 등 총 8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대체로 10년간에 걸쳐 균등하게 지급받게 됐다. 그러나 이 자금은 현금 형식으로 곧장 한국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 값에 해당하는 일본의 생산물 및 용역, 기술이 제공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한일 경제협력 사업은 일본 기업에게도 단단히 한몫 챙길 수 있는 일거리였다. 가령 미쓰비시(三菱) 그룹은 경인선 전철화, 서울지하철, 당인리발전소, 수출공업단지 조성, 포항제철 건설 등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을 독점해 막대한 이문을 챙겼다. 전범(戰犯) 기업이라는 과거사가 무색할 정도였다. 여기에 편승한 한국 기업들도 일본의 생산물 및 용역 관련 사업과 어떻게든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총액 8억달러 이상 가운데 무상 3억달러 및 유상 2억달러와 관련,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조약 가조인 직후 “우리의 ‘청구권’에 의한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 ‘청구권’ 자금에 대해 청구권자로서의 권리를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이 자금의 도입을 위해 한국은 매년 집행계획서를 작성해 일본과 협의한 후 승인 받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와 관련해 196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한일 경제각료간담회에서 장기영 당시 경제부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님에게 무슨 어려운 주문이나 난제를 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경제의 관점에서 경제인의 사고에서 상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제경제 관계에서 협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국제분업의 원칙에 입각해 상의하고자 합니다.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공정한 협의를 원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민간차관 부분은 물론, 식민지 관계 청산을 위해 획득했다고 스스로 주장한 3억달러 및 2억달러 등 5억달러조차 ‘경제의 관점에서 경제인의 사고에서 상의’하면서 한일 양국이 주고 받기의 원칙 하에 일본과 나눠가질 수 있는 사안으로 간주한 것이다. 물론 장기영이 언급한 ‘기브 앤드 테이크’의 내용은 한국이 일본 기업의 생산물 및 용역을 ‘받는’ 대신, 일본에게는 일본 정부가 지출하는 자금 자체를 일본 기업이 취할 수 있게 ‘주는’ 것이었다.

한일 간의 경제적 격차가 엄존하던 상황에서 어떻게든 상호 이익을 도모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한일관계는 ‘공정’한 것이었다. 남북 분단이라는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또 미국의 원조가 바닥을 친 상황에서 한국이 산업화를 위한 자금, 기술, 경험을 얻어낼 수 있는 국가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도 과거사를 봉인한 가운데 한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 일본과의 수직적인 분업체계를 만들어갈 기회였다.

하지만 식민 지배에 따른 가해-피해를 청산한다는 청구권 자금의 성격은 물론이고, 지배-피지배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희망했던 당시의 문맥에서 보더라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 ‘기브 앤드 테이크’하는 관계를 반드시 정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관계를 비록 박정희 정부가 유인했다손 치더라도, 일본 자본이 경제의 논리에 따라 한국으로 대거 몰려온 상황은 좋게 말하면 경제적 상호의존이었고, 뒤집어 보면 과거 일제의 경제 ‘침략’을 방불케 하는 경제적 종속관계의 재구축일 뿐이었다. 이러한 한일 경제관계의 모순은 지금도 거의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고질적인 무역 불균형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데도 일본이 ‘헌신적으로’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대일 ‘청구권’ 자금 5억달러의 4분의 1에 가까운 1억1,948만달러가 투입돼 건설된 포항종합제철소(포스코). 여기에는 일본 미쓰비시 그룹의 자본과 용역, 기술이 대거 투입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일본 경제 원조의 뿌리는 미국의 대일 원조

더군다나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복잡한 국제정치적 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이 한국에 줬다는 경제협력 자금의 뿌리는 미국의 대일 원조자금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대일 원조자금이란 미국이 패망한 일본을 점령하는 동안 일본에 제공한 이른바 점령지역구제기금(GARIOA)을 말한다. 다만, 전후 초토화된 일본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재건을 하는 데 주로 사용된 미국의 원조자금은 약 20억달러에 달했는데 공짜가 아니었다. 이 원조자금은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제14조에 ‘기타 청구권’으로 규정되어 배상 및 전전(戰前) 채무와 함께 일본이 나중에 미국에 갚아야 할 채무로서 책정됐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지원은 바로 미국의 대일 원조자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점령기 미국이 제공한 원조물자를 일본 국민들이 현금으로 구입하고, 일본 정부는 그 판매 대금을 나중에 미국에 갚기 위해 이른바 ‘미카에리 자금 특별회계’(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대충자금(對充資金) 특별회계’)라는 곳에 적립해 뒀다. 이 적립금이 산업투자특별회계로 이름을 바꾼 뒤 1960년 해외경제협력기금의 설립을 위한 자본금으로 충당되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은 이 해외경제협력기금을 통해 이뤄졌다.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면, 전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의 전후복구를 위해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 그 변제를 위해 일본이 모아둔 자금이 이번에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일본의 한국 경제지원용으로 재활용된 셈이다.

사실 해방 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바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미군정기 이후 적어도 195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정책은 일본의 전후복구를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미국은 일본의 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을 중시해 한국에 대한 원조물자를 가능하면 일본에서 구매해 조달하려 했다.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툭하면 충돌했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가 경제의 질적 전환에 필수적인 생산·자본재보다는 경제안정과 국방예산의 확보를 위한 소비재 중심이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미국의 일본중시 지역통합 전략이 일본의 전후복구가 완료되고, 반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 능력이 거의 한계점에 도달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중대한 전환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기존의 한국에 대한 직접원조로부터 일본에 의한 한국 지원 형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이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 청구권 타협으로 구체화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예정이던 GARIOA 채권 약 20억달러를 약 5억달러로 삭감해준다. 더욱이 1961년 1월 미일 간에 체결된 이른바 GARIOA 원조금 변제 협정은 이 5억달러조차 “동아시아 각국 경제의 신속하고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용되도록 규정됐다. 요컨대 일본이 한국이 제공했다는 경제원조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편승한 결과 이뤄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선 가해자였고, 한국전쟁이라는 열전(熱戰)과 이후의 한반도에서 전개된 냉전에 관한 한 최대의 수혜자였다.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일본의 역할에 대해선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아베 총리가 주장한 ‘헌신적인’ 기여자가 아니었던 점은 분명하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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