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때가 되면 백야가 생각난다. 처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서 보았던 백야. 이 후 몇 차례의 여행지에서 경험했던 백야. 그리고 그때의 체험들, 시에 관한 생각들이 떠오르곤 한다. 백야는 주소가 없다. 사람들은 백야의 주소를 알 수 없다. 수신자가 지워진 이름의 편지들이 백야에 흩어지듯이, 하얗게 흩어진 글자들의 여행이 설원이듯이, 아무도 모르게 백야는 설원에 자신의 핏방울을 떨어뜨린다. 백야는 하늘의 한 가운데 떠도는 우편번호다.
백야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할 거주지에 머물고 있다. 백야는 너무 일찍 뜯겨버린 편지처럼 하늘에 흘러있다. 백야는 눈을 감고 바람을 마신다. 아주 긴 잠을 자고 일어난 후면 늘 바람에게서 다른 냄새가 느껴진다. 백야기간 동안 체험한 몽롱한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나는 내가 어디서 다시 깨어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에게 사랑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당신의 이마를 보면서 꿈꾸어 보는 시간처럼 그것은 아득하고 외로운 일이다.
1876년 백야기간에 추기경들은 난민과 같은 방랑의 순례를 했다. 순례는 도보여행이다. 그들은 전망을 찾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었다. 언덕을 올라가 만나게 되는 숨막힐 듯한 전망, 시에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백야 기간 동안 낯선 나라의 벽에서 현상범 수배사진 전단을 보았다. 현상범이 현상에 걸려 숨어 지내고 있는 것을. 뉴스에 의하면 그는 생후 2주 만에 자신을 쓰레기통에 버린 어미를 20년 만에 찾아가 목을 물어 죽였다고 했다. 분명 피를 그리워하는 세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숨어 살고 있다.
그때 백야는 어디로 흘러갔던 것일까? 시베리아 횡단 기차에서 내려 나는 타테우스의 건축물을 보곤 했다. 건축은 인간의 손에서 흘러나온 자연이지만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는 자연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자연이 되는 것이다. 타테우스 칸토르의 건축은 인간이 허공에 시간을 부어 빚어낸 공간이지만 저 스스로 시간을 다시 만들어 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완성되는 순간 사람들은 타테우스 칸토르의 건축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 존명을 예견할 수 없다. 허공이 키우는 이 공간은 우리가 모르는 시간을 견디며 늙어간다. 하나의 건축, 그곳을 구축하고 드나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은 건축보다도 쉽게 허물어지곤 한다.
백야는 언어 뒤에 숨는다. 세계는 언어 속에 감추어져 있다. 세계는 언어들의 수증기를 마시며 숨쉰다. 시인은 언어 속에서 백야를 발견하고 겸허해진다. 시는 침묵의 언어에 다가가기 위해 입 속의 새떼를 모두 날려보내고 입안에 백야를 기른다. 말은 발화의 지점이지만 언어는 침묵의 지점이므로, 시는 언어를 머금고 있는 연습이다. 음악이 발화하지만 말하지 않듯 침묵은 말하지 않지만 언어로 존재하듯이. 가끔 내 문장 속으로 들어온 세상은 그리움을 갖는다. 시를 쓰는 일 역시 문장 속에 숨어 있는 공기를 찾는 일이다.
멀리 있는 행성일수록 우주와는 가까워지듯이 글쓰기는 거주지를 잊는 경험이다. 내가 쓴 시들은 그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들’일지 모른다.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 안의 피에 굶주린 인간들을 달래는 것이다. 바흐의 음악은 고통에 답한다. 친절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 고통의 질서. 바흐는 남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친절하다고 그건 약함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고통은 잊혀지지 않으려는 시간의 친절이다.
기차에서 내려 박물관에 가서 보았다. 바흐가 입었던 녹색의 코트. 이슬이 마르지 못하는 초록코트. 인간의 피를 마셔본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은 고통스럽고 친절한 음악이다. 그들은 자신 보다 오래 살아남을 언어들의 울음을 남겨두었다. 음악은 발걸음이 지워지는 보행이다. 백야를 따라 여행을 하며 나는 시를 쓰는 일 역시 문장 속에 숨어 있는 그와 같은 공기를 찾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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