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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친 걸까 모자란 걸까… 선택 받지 못한 B컷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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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친 걸까 모자란 걸까… 선택 받지 못한 B컷 책 표지

입력
2015.05.0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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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유와 제약 공존하는

흥미진진한 북 디자인의 세계

서랍 속 잠들어 있던 B컷 화보와

뒷담화 넘나드는 인터뷰 모아

B컷: 북디자이너의 세 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달출판사·416쪽·3만3,000원
B컷: 북디자이너의 세 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달출판사·416쪽·3만3,000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것은 2012년이다. 당시 판권을 따낸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들뜬 분위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회심리학의 고전이자 스테디셀러 중의 스테디셀러인 책의 내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유명 번역가인 김석희 작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표지 디자인은 출판사의 아트 디렉터인 김태형씨에게 떨어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 B컷. 달 출판사 제공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 B컷. 달 출판사 제공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 A컷. 달 출판사 제공
파울로 코엘료의 '브리다' A컷. 달 출판사 제공

김씨는 거대한 자유와 제약 앞에 섰다. 무명의 저자가 썼거나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책의 경우, 북 디자인의 목표는 ‘눈에 띄는 것’에 집중되지만 프롬의 책은 제목이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디자인은 좀더 자유로워도 될 것이었다. 한편으론 80년대부터 꾸준히 출간된 수많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미지들과 중복되지 않는, 참신하고 현대적이면서 고전의 품위를 잃지 않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김훈 '공무도하'의 B컷. 달 출판사 제공
김훈 '공무도하'의 B컷. 달 출판사 제공
김훈 '공무도하'의 A컷. 달 출판사 제공
김훈 '공무도하'의 A컷. 달 출판사 제공

저자의 이름과 책 제목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김 씨의 눈에 재미있는 점이 띄었다. ‘Erich Fromm’과 ‘Escape From Freedom’의 영문 배열이 모두 ‘E’와 ‘F’를 머릿글자로 하고 있는 것. 김씨는 저자명과 제목을 겹쳐 쓰고 색깔을 달리해, 검정색 글자를 따라가면 저자의 이름이, 파란색 글자를 따라가면 책 제목이 읽히는 구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디자인을 본 이들의 반응은 기대와 달리 시큰둥했다. 대중의 관심은 재치 넘치는 타이포그래피가 아니라 가독성 좋은 한글 제목이며 이 디자인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심혈을 기울였던 김씨의 야심 찬 디자인은 서랍 속에 잠들었다.

책 디자이너들의 서랍 안에는 이 같은 B컷이 수두룩하다. 최근 출간된 ‘B컷: 북디자이너의 세 번째 서랍’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B컷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김태형, 김형균, 박진범, 송윤형, 엄혜리, 이경란, 정은경 등 책 디자인으로 잔뼈가 굵은 7인이 자신의 서랍을 공개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장된 B컷과 채택된 A컷을 풍성한 화보로 보여주고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후일담과 뒷담화를 넘나드는 그들의 이야기는 책 디자인의 세계뿐 아니라 국내 출판계의 생리와 분위기를 엿볼 수 있어 더욱 흥미진진하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B컷. 달 출판사 제공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B컷. 달 출판사 제공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A컷.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달 출판사 제공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A컷.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달 출판사 제공

작가정신, 문학동네를 거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송윤형씨는 “디자이너로서 자존심을 강조하느라 작가의 의견을 간과했다가는 큰일난다”고 말한다. 팬층이 두터운 작가의 경우 작가의 취향과 독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표지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남성 작가보다 여성 작가들이 훨씬 크다. 송씨가 함께 작업했던 남성 작가 중 유일하게 표지에 관심을 보였던 작가는 황석영 소설가로, 디자이너는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대단하신 분”으로 기억했다. 신경숙 작가 역시 “‘적당히’가 없으신 분”으로, 신씨의 장편소설 ‘리진’의 표지를 디자인할 당시 문학동네 미술부에는 긴 한숨으로 가득했다. ‘이거다!’ 싶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자 미술부 모든 디자이너가 달려 들었고 며칠 동안 시안 릴레이가 이어졌다. 막판엔 다들 탈진해서 회사 옥상 자갈밭에서 말없이 돌탑을 쌓으며 동료의식을 다졌다는 후문이다.

은희경 소설가는 예쁘장한 표지를 원하지 않아서, 최민석 소설가는 어마어마한 B급 코드와 고급 장정 제안으로 A컷과 B컷이 완전히 달라진 경우다. 고종석씨의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의 표지는 작가와 출판사 모두 만족했으나 한 유명인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표지 디자인을 혹평하는 바람에, B컷에 대한 디자이너의 미련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책의 백미는 역시 수많은 B컷들을 품평해볼 기회다. 시장과 독자로부터 외면 당할 것이라 판정 받은, 소설가 김중혁씨의 표현에 따르면 “완벽한 모범생”이 아닌 “매력적인 괴짜” 같은 B컷들은 입방아를 찧기에 딱 좋다. 독자들은 저마다 심사위원이 되어 “A컷 말고 이걸 썼어야지” 혹은 “B컷인 이유가 있구만” 등의 품평을 내려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출간을 기념한 전시도 열린다. 5월 14~22일 서교동 땡스북스 2층 ‘더갤러리’에서는 책에 언급된 B컷들이 A컷을 제치고 당당히 벽에 걸려 독자들을 맞을 예정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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