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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졸업사진 찍었는데 왜 졸업을 못하니

입력
2015.05.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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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첨지가 그랬더랬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소설 '운수 좋은 날'의 한 대목이 떠오르다니. 왜 그랬을까 싶었던 그 날은 후배들의 졸업사진 촬영 날이었다.

졸업 때를 놓친 나는 ‘복학생’ 언니. 혹은 요즘엔 그냥 ‘화석’이라고도 부른다. 암모나이트라고도 하고 더 심하게 놀릴 때는 석유라고도 하던데, 하여튼 다 대학에서 오래오래 버티고 있는 신기한 ‘고학번’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슴이 찡하니 아프지만 선배는 물론이요, 동기, 후배의 졸업사진 촬영까지 보고 있는 자신을 보면 아무래도 ‘화석’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어김없이 봄 학기 시험이 끝난 딱 그 때, 봄꽃 지기 전, 졸업사진 촬영이 있었다. 친한 후배가 sns에 촬영 예고장을 날리니 어찌 찾아가지 않을쏘냐. 화석으로서의 민망함을 무릅쓰고 꽃밭에 당도하니 조명판이 번쩍번쩍, 하얀 실크 쟈켓에 후광이 비쳤다. 정장과 화장, 미장의 쓰리콤보. 환골탈태란 이럴 때 쓰는 말이라, 이대 앞 에스테틱숍엔 어떤 장인들이 있는 걸까.

에스테틱숍엔 장인들이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 노원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졸업앨범 촬영 중 구두를 들고 추억을 남기고 있다. 뉴시스
에스테틱숍엔 장인들이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 노원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졸업앨범 촬영 중 구두를 들고 추억을 남기고 있다. 뉴시스

대외활동에 교환학생에, 서로 못 보고 산 얼굴들이 워낙에 많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인사만 한 삼십분 하고 서있었다. 그렇다보니 오랜만에 본 동기,후배가 다가와 차례로 펀치 멘트를 날리고 갔다. “언니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졸업 안 하셨어요?” 응 그래. 그럼 졸업을 했는데 여기 책가방 메고 서있겠니. 9학기 째 재학 중인 선배(나)는 차마 맘 속 말은 날리지 못하고, 정장을 빼입은 후배들을 웃으며 그윽히 바라보았다. 크으. 참, 이쁘구나. 니네 이쁘다. 그래. 그녀들은 정말 이뻤다.

빼입은 정장도 예쁘고 뾰족한 구두도 당당하고 웨이브는 컬이 살아있고 쉐딩한 콧대가 오늘따라 높아 보이고. 어색하게 절뚝거리는 것도 이상하게 좋아보였다. 왠지 강남 거리에서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백반 먹으러 점심시간에 교차로를 건널 것 같은 그 이미지. 그런 포스가 풍기더라. 도서관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는 머리도 안 감았는데. 나는 휴대폰을 들고 열심히 사진사 노릇을 했다.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졸업 사진 촬영에 꽤나 돈도 들였다더라. 5만원에 메이크업과 헤어. 5명이 같이 가면 만원씩 할인이라 4만원씩 들었다고 자랑을 했다. (같은 숍이라 그런지 화장이 똑같았다) 정장과 원피스는 엄마가 선심 써서 좋은 걸 사주셔서 20만원 돈을 들였다고. 옆에 있던 후배 친구는 비장하게 조언했다. “이런 날 뽕을 뽑아야 돼. 뽕을. 취업 사진도 찍어.”

취업 사진이라 하면 증명사진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겠으나, 알아두시라. 이것은 블루오션. 좀 다른 시장이다. 깔끔하게, 단정하게 각 기업에게 어필할 프로필 사진으로, 증명사진의 열 배는 더 신경 쓴다. 연예인급 프로필 사진이랄까. 메이크업 비용을 따로 받는 스튜디오도 있다. 정장을 빌려주는 건 기본이고 기업별로 선호할 만한 이미지를 고려해 배경색도 맞춰준다. 은은한 갈색은 차분한 분위기. 파란색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이미지. 지원 기업별로 바꿀 수 있다.

졸업 사진과 취업 사진을 거치면 사람이 두 번 새로 태어난다. 취업 사진의 메카엔 이대 앞 에스테틱 숍보다 더 한 기술자들이 있다. 화장보다 진일보한 인류 기술, 포토샵. 부정교합인 앞니 크기도 조절해준다. 콧구멍이 크면 포토샵 툴로 줄여주고, 눈동자가 반짝반짝해야 총명해 보인다고 반사빛도 그려 넣어준다. 이대 앞 숍에서 커리어 우먼의 정장을 사고, 뾰족 구두를 신고, 눈매를 그려 넣으면 이제 사진관에서 한 번 얼굴을 갈아서 ‘균형 잡힌’ 사회초년생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매듭 짓고, 사회초년생으로서의 시작을 준비한다. 어색한 졸업사진 촬영은 어쩌면 그 준비라서 설레고 또 싱숭생숭한 게 아닐까 싶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슬픈 반전은 그 새로운 시작이 잘 안 온다는 것이다. 졸업 사진을 찍고도 졸업 못 하는 ‘화석’들이 부지기수다. 시작은 내 맘처럼 쉽지가 않다. 취업문이 바늘구멍이고 낙타는 만 마리 대기 중인데 갈 데 없는 졸업이 반가울 이유가 뭐 있을까. 졸업앨범에 남은 얼굴들도 여전히 학교를 떠돈다.

후배들 졸업 사진 촬영이 끝나고 동기에게 연락을 받았다. “언니, 우리 술 먹자. 나 아직 학교 다녀. 시간 돼?” 아니, 내가 분명히 니가 작년에 졸업 사진 찍는 걸 봤는데, 왜 아직 학교에 있니. 동기는 몇 학점을 추가로 들으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추가 학기를 듣거나 졸업을 유예해 두고 취업 준비에 시간을 쏟는다.

사회는 'NG(NO GRADUATION)족'이라 부른다. 졸업 때가 돼서도 졸업 논문이나 영어 성적 제출을 미뤄두거나, 혹은 1~2학점만 들으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대학생을 가리킨다. 교육부 추산 2014년까지 만 명 이상이 이 상태다. 14,975명이 유령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졸업 사진도 이제 모두의 통과 의례는 아니다. 껄끄러워 건너뛰는 사람도 많다. 듬성듬성 구멍 난 졸업 사진 대열이 쓸쓸한 이유다.

왜...왜 사진만 찍고 졸업을 못하누!! (김첨지st.) 게티이미지뱅크.
왜...왜 사진만 찍고 졸업을 못하누!! (김첨지st.)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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