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연설서도 기존 입장 반복
美의원·언론 사과 요구 묵살
진주만 언급하며 美엔 고개 숙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9일 미국 상ㆍ하원 합동연설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 2차 대전 책임과 관련, ‘깊게 반성하고 아시아 국가에 고통 준 것에 눈감을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일관계 정상화 가늠자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전된 입장을 제시했는데도, 아베 총리가 사실상 이를 무시함에 따라 향후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에 심한 격랑이 예상된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40여분간 진행된 합동연설에서 같은 문장과 단어를 반복하는 등 숙련되지 않은 영어로 미리 준비된 영문 연설문을 읽어 나갔다. 그는 “우리(일본)는 전쟁(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며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과거사 인식에서 고노담화 및 무라야마 담화 계승 등 일본의 기존 입장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명확한 사과가 필요하다는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미 연방 하원 의원 25명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언론의 요구를 묵살했다. 더구나 주변국의 식민지배와 침략 등에 대한 분명한 사죄의 뜻을 밝히지도 않았다.
반면 과거 일본이 벌였던 태평양전쟁과 그로 희생된 미국인들에는 강도 높은 용어로 반성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진주만 공격과 산호해 전투 등을 언급한 뒤,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신해 2차 대전에서 숨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함께 영원한 위로를 보낸다”고 말했다.
전후 일본이 동아시아와 미국 경제에 도움을 줬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1980년대 한국과 대만 등이 경제를 발전시킬 때 일본은 자본과 기술을 투입해 이를 지원했다”고 생색을 낸데 이어, “미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이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의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의 이런 행태는 방미 기간 내내 이어지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핵심을 비켜가는 모호한 화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버드대 강연(27일)과 미일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28일)에서 위안부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주체를 생략하고 ‘인신매매’라는 표현으로 핵심을 비켜가는 행태를 보여왔다. 28일에는 “전쟁 중에 여성의 인권이 종종 침해 당해 왔다”며 위안부 문제를 전시 문제로 일반화하려는 듯한 언급도 했다.
위안부 이슈를 무시ㆍ돌파하려는 행태는 아베 총리가 합동 연설에 나서기 전부터 예견됐다. 워싱턴 외교가의 대표적 지일파인 세일라 스미스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전날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입장만 고수할 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전된 입장은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 이슈일 뿐 미국과 관계된 게 아니라는 게 아베 총리의 인식”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워싱턴 일정에서 과거사 언급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30일 이후 캘리포니아 방문에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기대를 저버린 만큼 한일관계는 냉기류가 흐르면서 관계 개선도 험난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과거사와 안보ㆍ경제를 분리하는 ‘투 트랙’기조를 취한다는 게 우리 외교당국의 입장이지만, 과거사에서 진전이 없으면 다른 쪽도 탄력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이 우리 입장과 달리,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고 나선 것도 한국 외교가 풀어야 할 방정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전망이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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