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상실을 이야기 하는 것 역시 어렵다. 사랑하는 할머니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죽음과 상실을 알게 되었고, 그건 가슴이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사랑하는 존재가 세상에 이제 없다는 사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도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다.
외할머니는 오래 편찮으셨다. 등이 꼿꼿했던 할머니는 기억 속에만 남고, 할머니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작아지다 결국 사라진 것이다. 손이 작은 나는 할머니의 크고 하얀 손이 좋았다. 할머니의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거리면서 할머니랑 얘기하다 보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릴 때 그렇게 무서웠던 엄마도 할머니 품에 있을 때만은 괜찮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편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건 말도 못하게 커다란 행복이다. 그런 감정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넓었던 품이 얼마나 작아졌는지…. 작아진 할머니를 안으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할머니를 잃고 나서 아픔은 그 전의 아픔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내편이던 한 사람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지난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움과 상실감에 몸을 떨며 엉엉 울었다.
친할머니는 오래 미국에 사셨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일곱 남매를 혼자 키우신 할머니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당당한 분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한 분이다. 단 하루도 게으르게 살지 않으셨던 할머니가, 내가 어릴 때 미국에서 다니러 오신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안동에 살고 있었는데, 우릴 보시려고 안동까지 오셨다. 며칠 함께 지내면서 그 부지런함과 단정함, 누구를 대할 때도 공손한 모습을 보면서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따뜻하고 너그러운 분이었는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릴 때 늘 뭔가를 잃어버리던 나는 매일 같이 엄마한테 혼이 났다. 그날은 도시락통을 학교에 놓고 왔다. 엄마한테 칠칠맞다고 혼이 나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시면서 그러셨다. “가자!” 울다가 어리둥절해져 할머니 손을 잡고 학교까지 다시 갔다. 30분이나 걸어가야 하는 학교에 가서 도시락통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안동에 하나밖에 없는, 처음으로 생긴 피자집을 찾아가서 피자를 사 주셨다. 어린 나에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고3 때 바라던 대학에 다 떨어지고 미국에 계시는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그때 할머니가 그러셨다. “그게 무슨 큰일이냐. 괜찮다. 너만 괜찮으면 된다. 아프지 마라.” 내 마음이 잠잠해졌다. 유난스럽게 힘들어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담담하게 재수했다.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중심을 잃어갈 때 그때를 생각한다. 그 단단한 말투. 전쟁과 가난을 살아내며 생겨난 겸손함과 생명력이 할머니를 그렇게 멋진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힘을 나에게도 전해 주신 게 아닐까 싶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강인함이 있다면 그건 할머니를 닮은 것이다.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꾸 죽어간다.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네팔 여행에서 만났던 그 수많은 수줍고 착한 미소들이 사라졌다. 덜컥 겁이 난다. 우리를 잇고 있는 보이지 않는 끈들이 한쪽을 잃었다. 위로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진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혼자 남겨지는 건 아닐까. 서로 위로할 서로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꽃별 해금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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