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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패망의 초침 소리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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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패망의 초침 소리 생생

입력
2015.04.2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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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23일부터 4월30일까지 당시 안병찬 한국일보 특파원은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사이공에서 패망하는 월남의 마지막 순간과 떠오르는 통일 베트남의 여명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40년이 흐른 지금도 ‘사이공 최후의 특파원’으로 불린다. 여전히 현역 언론인임을 자임하는 안병찬 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이 베트남 현지에서 40년 전의 그날과 오늘의 베트남을 교차시키며, 역사의 의미와 한ㆍ베트남 양국 관계의 바람직한 길을 탐색하는 르포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40년 전 발행인 명령에 현지로, 한국일보만 베트남특파원 2명 발령

통일 결전 숨 가쁘게 종막 향해, 특종본능으로 전쟁의 공포 극복

안병찬 사이공특파원이 사이공 최후의 날을 취재한 기사 1보가 실린 한국일보 1975년 5월 6일자 1면. 4월 30일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기로 사이공을 탈출한 안 특파원은 이후 미군함정을 타고 괌에 도착해서야 1보를 전송할 수 있어 탈출 6일 후 지면에 실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병찬 사이공특파원이 사이공 최후의 날을 취재한 기사 1보가 실린 한국일보 1975년 5월 6일자 1면. 4월 30일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을 떠나는 마지막 헬기로 사이공을 탈출한 안 특파원은 이후 미군함정을 타고 괌에 도착해서야 1보를 전송할 수 있어 탈출 6일 후 지면에 실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6일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전 한국일보에 함께 근무한 후배 임종건(전 서울경제 사장)을 만나 금년에도 바므이땅뜨(베트남 통일기념일ㆍ4월30일) 그날에 맞추어 베트남을 찾아 간다고 알렸더니 이런 반응을 보였다.

“안 선배는 베트남과 참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오고 있네요.”

아름다운 관계라는 그의 표현 한 마디에 나는 감동했다. 베트남과 끈질긴 인연을 맺고 있다는 말은 노상 듣는 처지이지만, 아름다운 관계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이는 초록색 사기(社旗)를 들어 올린 한국일보가 나에게 동기를 부여한 덕이다.

1975년 봄. 북베트남군이 건곤일척의 총공세를 펼쳐, 남북 베트남은 운명을 걸고 대판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바야흐로 통일결전이 종막을 향해 숨 가쁘게 전개 되던 3월 21일 금요일이다.

한국일보와 사이공

편집국 외신부 책상머리의 내선 전화가 크게 울렸다. 장기영 창간발행인이 나와 다짜고짜 단도직입으로 몰아친다.

“안병찬 씨, 당장 출발 준비하세요! 즉시 사이공으로 떠나요.”

장 사주의 구두 명령 한 마디에 나는 축구의 내차고 돌진하는 전법(킥 앤드 러시)을 써서 토요일 휴무 중인 월남대사관에 쳐들어가서 입국사증을 받아내고 23일 일요일에 비행기를 탔다. 한국일보는 일주일 후인 3월 30일 나를 지원할 양평 특파원을 증파했는데 그는 나와 함께 26일간 동고동락하다가 한국일보 본사의 명으로 4월 25일에 한발 앞서 철수한 바 있다. 특이한 것은 당시 오직 한국일보만 2명의 베트남 기동특파원을 발령했으니 이는 한국일보의 동태적인 조직 풍토에서 말미암은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사이공의 최후 상황과 정면 대결하게 될 줄은 미처 모르고 숨이 차게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사이공에 도착한 3월 23일부터 38일 동안 내게 들리는 것은 멸망의 초침 소리뿐이었고 보이는 것은 특종거리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매우 두려웠지만 특종본능은 그런 공포심을 제압했다.

4월 28일 사이공 최악의 날

나는 사이공을 공중 탈출하여 귀환한 뒤 펴낸 르포르타주 저서 ‘사이공 최후의 새벽’에서 독 안에 든 쥐처럼 포위당한 사이공의 최후의 3일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4월 28일 ‘사이공 최악의 날’ ▦4월 29일 ‘항복전야’ ▦4월 30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이다. 우연인지 이탈리아 특파원인 티지아노 테르자니도 1년 후에 발간한 저서 ‘지아이퐁(해방)’에서 사이공의 패망을 4월 28일, 29일, 30일의 3일로 분류하고 있다.

40년 전 사이공 최악의 날 아침을 나는 이렇게 기술했다.

“4월 28일 월요일 아침, 7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에 나는 응우옌 후에로 129번지 응우옌 후에 빌딩 2층 사무실에서 눈을 떴다. 적막한 고독감이 몸에 깊이 스며들었다. 언제 어떻게 결정적인 탈출의 순간이 닥칠 것이며 그것이 바로 마지막 순간임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사이공 최후의 순간.’ 그것은 특파원으로서의 나를 맹렬하게 유혹하면서 끊임없이 괴롭혀온 과제였다.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라고는 없다. 내가 서울의 어느 커피 집에 다시 앉을 때까지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다. 날씨는 쾌청하여 그 인상적인 사이공의 태양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거리와 지붕에 강렬한 햇살을 퍼붓기 위해 중천을 향해 떠올랐다. 눈부신 사이공의 일광은 그처럼 유장(悠長)했다…”

하노이, 순직한 종군기자 270명

금년은 바므이땅뜨 40주년. 베트남 정부는 시조인 흥 봉왕 제삿날(4월28일)부터 해방기념일 겸 통일기념일(4월30일)과 노동절(5월1일)을 지나 5월3일 일요일까지 6일간을 연휴로 정했다.

나는 정도(定都)한지가 1,000년이 넘은 하노이에 올 때마다, 이 수도는 일천 일백 이십년 동안 오로지 자기 의지와 자기 힘으로 항중, 항불, 항미 전쟁을 수행하여 모조리 승리한,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국의 도읍임을 되새긴다.

27일 아침 내가 맨 먼저 방문한 곳은 국영 베트남통신사(통덩싸베트남)이다. 금년 초 본관 7층에 통신사 70년의 자료를 모은 역사관을 새로 꾸몄기에 이를 관람하기 위함이다.

우리 일행을 초청해 준 것은 통신사 외국어판 간행부서의 쩐 카잉 번 부사장(한베타임즈 편집부위원장 겸임)이다. 그녀는 베트남국영통신사의 서울지국장으로 근무하던 2010년 4월에 나를 탐방해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보도한 경과를 취재해 갔고, 이어 나는 그녀를 지국으로 찾아가 '나를 탐방한 베트남 여성 특파원 역 취재기'를 썼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취재한 인연으로 유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 역사관의 전시물을 따라가다 보면 맨 끝에서 기록의 절정을 만난다. 1947년부터 1970년 대 말에 이르는 기나긴 항불·항미 전쟁기간에 순직한 전쟁기자들의 명단과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순직기자는 총 270명이지만 확인 된 명단은 253명이다. 초상이 남아있는 순직기자는 모두 90명, 그 중 9명이 여성이다. 순직자 이름은 쩐 킴 쑤엔(1921~1947)으로 시작하여 맨 끝은 즈엉 득 덩(1952~1985)에서 끝난다. 최초의 순직자 쩐 킴 쑤엔은 통신사 부사장으로 직책이 가장 높다. 2013년 하노이에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생겼다.

베트남통신사의 전쟁기자는 기자인 동시에 전사(戰士)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사회주의 베트남의 유일한 국영통신사라는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중국의 국영통신 신화사와 같은 구조이다.

극적으로 월남을 탈출한 피난민과 교민들을 실은 대한민국 해군 815함이 1975년 4월 26일 사이공을 출발한 지 17일 만인 5월 13일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한국보도사진연감
극적으로 월남을 탈출한 피난민과 교민들을 실은 대한민국 해군 815함이 1975년 4월 26일 사이공을 출발한 지 17일 만인 5월 13일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한국보도사진연감

베트남 천년 도읍 하노이, 스스로 힘으로 항중ㆍ항불ㆍ항미…

국영통신사 새로 꾸민 역사관, 순직한 전쟁기자 270명 기려

"미국을 비롯한 왕년의 적들과 어떻게 우호관계 맺었는지 흥미"

심포지엄 중계 40년 전쟁의 ‘기자용사’

24일 베트남통신사 본사에서는 전쟁기자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공동 주최자는 베트남통신사, 비에텔 텔레비전, 인민군보, 언론통신학회, 베트남기자협회이다. 이 자리에는 베트남통신사 출신의 전직 전쟁기자와 지방방송 소속 언론인 20여명, 그리고 해외 언론인 대표들이 참석하여 베트남의 40년 전쟁에서 전쟁기자가 수행한 역할을 되새겼다고 한다. 응우옌 둑 로이 베트남통신사 사장은 그들은 극한의 조건에서 전쟁을 정확하게 알리고자 목숨을 걸었고 그로써 베트남의 모든 전사와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독립을 향해 끝까지 싸울 신념을 주었다고 찬양했다.

베트남통신사의 유명한 전쟁기자 출신으로 사장을 역임한 쩐 마이 흐엉은 전쟁기자들은 모든 단위 전투의 최전선에 종군했으므로 '기자용사'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용사들은 구식 장비로 최일선 보도에 임했으니 위대한 보도를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장비보다 인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이색적인 발언을 한 것은 유럽 발칸반도의 코소보에서 온 언론학 여교수 렘지 샤히니-혹스하지(코소보 대학)였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과 세르비아계 주민이 격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알바니아계가 2008년에 독립을 달성한 국가이다. 렘지 교수는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비롯한 적들과 처절히 싸웠으면서 왕년의 적들과 어떻게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지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녀는 베트남의 메시지를 코소보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하겠다고 했다(이상 베트남뉴스 4월25일자 참조).

미국 당국은 베트남 전쟁 때 언론에 방임정책을 썼다. 결국 반전 여론이 일어나고 확산되자 언론 보도에 탓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새롭게 고안한 것이 이른바 임베디드 보도방침이다. 이는 종군기자를 엮어서 제한적인 곳만 안내해 활동을 제약하는 봉쇄적인 통제수단이다.

베트남 여성 특파원 역 취재기

해마다 4월이 오면 나는 열병을 앓는다. 꽃 피는 4월이 와서가 아니다. 사이공이 패망하고 베트남이 통일되던 때의 강렬한 햇살과 열대성 소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2010년, 초봄의 부슬비가 내리는 3월의 마지막 날, 한 여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만나서 35년 전 사이공 패망 당시에 겪은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한다. 자기는 ‘베트남통신사(TTXVN)’ 서울지국장 쩐 카잉 번이라고 소개한다. 바야흐로 4월의 열병이 시작 될 때 베트남의 탐방자라니 내심으로 반가웠다. 나는 번 특파원이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그녀는 양장 차림이다.

그녀는 자기가 한 살일 때 사이공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일 저일 물으며 디지털 카메라로 나를 촬영했다. 나는 사이공 해방 30주년에 맞추어 2005년 4월에 출간한 증보판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 한 권을 기증했다. 그녀는 긴박했던 사이공의 마지막 날들에 내가 촬영한 사진들 중에서 여러 장을 골라냈다.

이튿날 4월 첫 날에도 봄비가 내렸다. 나는 서울 성북구 동성동 2가에 있는 베트남통신사 서울지국을 전격적으로 찾았다. 쩐 카잉 번 지국장과 베트남 통신사를 스케치하고 싶어서다. 쩐 카잉 번 지국장과 함께 일하는 동료 특파원 한 명은 취재차 외출하고 없었다.

그녀는 그날 두 가지 뉴스에 비중을 두어 본사에 송고했다고 한다. 우선 침몰한 천안함에 관한 소식이다. ‘한국 해군이 천안함 침몰에 늦장 대응했다’는 세간의 비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여성가족부가 4월에 시작하는 ‘국제결혼행복프로그램’이다. 한국에 시집을 온 베트남 며느리가 많기 때문에 다문화 가정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쩐 카잉 번 지국장은 하노이종합대학교 문학과에 다니며 2년 동안 ‘한국언어와 문화’ 강의를 수강하여 한국어 기초를 닦았다. 베트남통신사에 입사에 입사하여 국제부에 배속한 12년 차 기자였다.

그녀는 특파원으로 남북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관계와 중일관계, 그리고 경제정책이 자기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했다. 그녀가 내게 물은 것은 베트남의 경제전망이다. 나는 베트남이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과 10년의 격차를 두고 쇄신정책을 채택하여 연착륙하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호찌민시가 옛날에 비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본래 아름다운 사이공의 얼굴이 경제개발로 많이 망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이렇게 12년 차 베트남 여성 특파원과 48년 차 전 한국일보 사이공 최후의 특파원은 비오는 날에 만나서 서로 상대를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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