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읽었던 자신만의 우화 같은 게 있을 거다. 내 경우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때가 묻었다고 여겨질 때 종종 생각나는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그런데,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제제라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내용도, 등장인물도, 인상적인 대사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다. 호기심 많고 활달한 듯 예민한 제제에게 나 자신을 투영했었던 듯한데, 그 또래에 그런 일은 딱히 유별난 일도 아니었을 거다. 어떤 내용이었을까. 워낙 유명한 책이기도 하니 인터넷을 뒤져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별로 그러고 싶진 않다. 나는 지금 어떤 스토리나, 책이 전하고자 한 주제나 교훈 같은 걸 곱씹으려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그 무렵 주로 읽던 추리소설 따위와는 조금 차별화된 독서 체험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어떤 소년이었을까. 읽을 때에도, 라임오렌지나무의 생김새에 대해 궁금해 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상기되는 것 역시 한 그루의 라임오렌지나무다. 제대로 본 적도 없고, 모양도 잘 모르는 나무 한 그루가 지금 내 정수리에 자라는 느낌. 책을 기억하는 방식, 책 한 권이 사람 마음에 되새겨지는 방식이 이런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내 머리에 심어진, 나 스스로는 볼 수 없는 라임오렌지나무. 그걸 제대로 그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곧 내 연인일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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