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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시는 국가보다 영속한다

입력
2015.04.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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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대학원 시절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의 ‘도시의 건축’을 읽을 때였다. “도시는 국가보다 영속한다”라는 구절은 꽤나 낯설었다. 유럽,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건축가에게 도시는 영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대 유적에 르네상스, 바로크의 도시 개조 계획이 덧대지고, 그 위에 다시 현대도시가 건설된 로마를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는 또 어떤가? 전쟁이 끝날 때마다 달라진 국경선에 따라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 번갈아 가며 편입되었지만, 도시의 정체성은 여전하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우여곡절은 더 심하다. 칸트가 근대 독일철학의 정수를 집필하는 동안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프로이센 왕들이 대관식을 올리던 유서 깊은 ‘왕의 도시’였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종전과 함께 소련에 편입되어 칼리닌그라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이때 독일인은 거의 모두 추방되어 지금은 러시아인들의 도시다. 소련 붕괴 후에는 신생 독립국가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러시아 영토가 된다. 구성원, 국가 등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도시는 여전히 건재하다. 유럽의 도시들은 정치체제, 국가의 흥망성쇠 같은 풍파에도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인공물에 기대 고유의 정체성을 이어간다.

국경선 변화가 거의 없기에 도시 구성원이 달라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한국의 도시도 유럽 못지 않은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면 서울이 한국보다 더 영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5,000년 역사와 단일민족 국가라는 환상과 신화를 오랫동안 교육 받아서인지 서울이 한국보다 더 길게 이어지리라는 말이 그리 와 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오래된 유산을 대하는 태도는 종잡을 수가 없다. 역사도시로 만들겠다며 조선 시대의 유적을 박제처럼 복원하려는 시도와 개발 이익 앞에 유적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태도가 뒤엉켜 있다. 그나마 형태가 있는 건축물이나 유적은 사정이 낫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녹아 있는 무형의 것들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가 새 도로명 주소다. 지번 중심의 체계와 도로 중심의 체계는 서로 다른 도시 구조, 도시에 관한 서로 다른 인식을 전제한다. 필지가 먼저 생기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길이 난 서울의 도시 구조는 격자형 도로가 필지보다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우선인 뉴욕과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 새 도로명 주소를 둘러싼 불편함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동’이 쌓아온 역사도 함께 흐려질 것이 분명하다.

셀 수 없이 많은 문인과 학자들의 문장을 찾아 매번 새 도로명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꾼다 한들 동에 차곡차곡 다져진 의미의 더께까지 함께 옮길 수는 없다. 동을 없앤 일은 서울성곽을 허문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종마을이란 뚱딴지 같은 이름도 마찬가지다. 경복궁 주변은 서촌, 북촌, 남촌 등으로 불려온 유구한 역사가 있다. 지명 속에 위치는 물론 역사가 스며들어 있다. 세종은 도처에서 사용되기에 지명으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통의동, 효자동 일대는 경복궁과 청와대 근처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재산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한 채 낙후된 곳이었다. 수십년 동안 서촌을 지켜온 상인과 이곳으로 모여든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오늘의 서촌 문화를 일궈왔다. 행정에 의해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세종마을은 서촌과 무관하다.

봄꽃과 새싹이 만연한 요즘, 서촌에 자리잡은 문화예술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스튜디오, 가게를 일반인에게 오픈하는 ‘서촌 오픈하우스’가 한창 진행 중이다. 앞으로 이 행사가 세종마을 오픈 하우스로 바뀌게 될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도시가 우리네 삶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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