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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나타난 기증자… 그런데 기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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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나타난 기증자… 그런데 기쁘지 않다

입력
2015.04.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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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인생의 끝을 맞은 남자

장기 기증자 나타났지만

찾아든 건 기쁨 아닌 철학적 난제들

약으로 바뀌는 감정도 진짜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뭔가

다비드 바그너 지음·박규호 옮김 민음사 발행·324쪽·1만3,000원
다비드 바그너 지음·박규호 옮김 민음사 발행·324쪽·1만3,000원

하나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분리되는 순간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분리되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 그러므로 병원과 무덤은 철학의 영역일 수 밖에 없다. 삶과 나의 접착성이 헐거워지는 그곳에서 우리의 지정의(知情意)는 거대한 원심력에 실려 지구 바깥으로 튕겨 나간다.

독일의 신예작가 다비드 바그너의 ‘삶’은 각혈로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자가면역성 간염을 앓아온 W는 어느 날 자정, 욕조에 피를 한 움큼 쏟아낸 뒤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나선 치료와 퇴원. 소설 속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사가 그의 부재를 이용해 집을 턴다든가, 섹시한 간호사가 한밤중에 찾아오는 일이 없다는 얘기다. W가 병원 침대에 누워 쏟아내는 망상과 사유가 이 소설의 처음이자 끝이다.

겉으로 보기에 한낱 막대기인 식물의 내부에서 격렬한 생체운동이 일어나듯, W가 누운 손바닥만한 침대 위에서도 우주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일이 반복된다. 약은 그가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케 만드는 첫 번째 원인이다. 손톱만한 알약을 삼키는 행위가 ‘우울’이라는 정신의 영역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육신과 영혼의 괴리가 시작된다.

“내 감정, 내 지각이 모두 화학반응에 유도된 것일까· 내가 느끼고 본다고 믿는 것들이 단지 질병의 결과인 게 아닐까· 내 슬픔도 단순히 화학적 원인에서 나오는 걸까· 내 몸의 생화학이 내 감정을 결정하는 걸까·”

W가 해결해야 할 질문은 이뿐이 아니다. W의 간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고 그는 간을 이식 받아야 한다. 장기 이식 수술 날짜는, 당연한 얘기지만 기증자의 사망 날짜와 같다. 미친 듯이 신문의 부고기사를 스크랩하는 그에게 ‘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이 주어진다. 딸 때문이라는 답변에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다. 삶에 좀 더 머물고 싶은 핑계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간만 이식 받으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보장도 마냥 반갑지 않다. 건강한 ‘나’는 이제까지의 ‘나’가 아닌 것이다. 좋게 말하면 새로운 삶, 그러나 실은 완전히 다른 삶. 2차 성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제2의 인생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 이별과 이혼과 이직을 망설이는 사람이 이해 받을 수 있다면 W의 망설임 역시 이해 받아 마땅하다.

“이대로 그냥 계속 살아가면 안 되나·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니면, 그게 안 되면, 그러면 그냥 죽으면 안 되나·”

개체의 격렬한 회의와 무관하게 세상은 상식 · 살아야 한다! - 을 따라 충실하게 돌아간다. W에게 맞는 간이 나타나고 그는 이식수술을 받는다.

소설을 덮고 난 뒤 터져 나오는 것은 W에게 허락된 새 삶에 대한 축하가 아니다. 삶은 왜 축하 받아야 하고, 죽음은 왜 애도 당해야 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삶에 밀착돼 천진하게 오욕칠정 속을 뒹구는 우리를, 작가는 삶과 죽음 사이를 벌려 만든 틈 사이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맛보는 것은 거대한 카타르시스, 죽음을 희롱하고 삶을 비웃어 본 자들만이 아는 극단적인 마음의 정화다.

이 같은 ‘극사실주의 병상일기’가 가능한 이유는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1971년 태어나 2000년 소설가로 등단한 바그너는 선천적 자가면역성 간염을 앓았고 몇 년 전 간을 이식 받았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 차이퉁이 “아마도 살아가면서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할” 책이라고 평한 이유다.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 문학상을 받았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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