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봄, 숙부가 돌아가셨다. 수년간의 암 투병 기간이 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잠깐 동안의 호전 증세를 겪은 탓에 돌연함은 예상 밖이었다. 장지는 부산. 만사 제치고 KTX를 탔다. 숙부에겐 아들만 하나 있다. 나보다 일곱 살 연하에 미혼. 상주 노릇 하는 외아들의 처연한 등을 보며 목젖 아래에서 물큰한 게 올라왔다. 숙모는 10여 년 전부터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어 언행이 불편한 상태. 어머니는 영정을 보며 “에고, 할머니가 삼촌이 제일 먼저 보고 싶으셨나 보다” 했다. 이러저러한 안부들이 오갔다. 죽음 곁에 있으되, 산 사람들의 북적댐은 이상하게 정겨웠다. 산 사람들의 추념 속에 있으되, 죽은 이의 보이지 않는 눈빛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다음날 아침 장지로 이동. 날이 기가 막히게 맑고 밝았다. 검은 복장의 조문객들로 넘쳐나는 화장장이 새로 지은 영화 세트 같았다. 의례적인 절차에 의한 입관과 통곡이 이어졌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가 다시 담소하는 과정마저 무슨 절차 같았다. 화장이 끝나고 사촌동생이 유골함을 들었다. 휠체어에 탄 숙모가 유골함을 어루만졌다. 숙부의 이름자를 또박또박 발음하며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OO야, 잘 가라. 내 쫌 이따 따라갈꾸마, 기다려라.” 하늘처럼 높고 맑고 명랑한 음성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터졌다. 눈 시리게 화창한 봄날이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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