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그로브 숲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다. 대개 물과 바다는 모래밭이나 절벽으로 나뉘어 그 경계가 분명하다. 여기는 뭍, 저기는 물. 서로 넘나들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완전한 괴리가 존재한다. 합수하는 곳(기수지)이 있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기도 하고, 뻘이 있어 그 접점을 조금 확장하기는 해도, 지형상으로나 겉모습으로나 둘은 확연히 구별된다. 그런데 맹그로브 숲은 뭍과 바다를 공유하면서 뭍의 생태와 바다의 생리를 보듬는다. 맹그로브 숲은 아열대나 열대 해변이나 하구의 습지에서 발달하는 숲이다. 잘 발달한 기근은 복잡하여 얽혀 괴상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숲은 물고기에게는 산란의 장소이며 은신처이기도 하고 먹이가 풍부한 낙원이고 태풍 때는 방풍림의 역할까지 충실한 유용한 숲이다.

맹그로브는 바닷물에 뿌리는 담그되 대기 중으로 드러낸 뿌리들이 호흡한다. 뿐만 아니라 새순처럼 뿌리가 내미는 어린 싹들은 마음껏 공기 중의 산소를 취해 잎과 줄기에는 에너지를 공급하고 바다에는 다양한 플랑크톤들이 자라날 조건을 만들어줌으로써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근처로 모이게 만든다. 그 숲은 뭍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듯, 뭍이며 동시에 바다인 공존과 공유의 조화를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의 위기와 병폐 가운데 하나는 공감 능력의 상실이다. 자신들의 탐욕과 무지 그리고 무책임 때문에 일어난 참사에 대해 한 해 다 지나도록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적반하장으로 그 때문에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느니, 지겹다느니 비난만 앞세운다. 정착 책임져야 할 정부는 나 몰라라 외면한다. 그렇게 허송세월 하면서 정작 회복해야 할 생명과 사람에 대한 가치를 연대하고 확장하지 못했다. 이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당장 각자의 입장에서 손익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공감과 신뢰를 잃게 된 막장극이다.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너와 나의 대립 구도로만 보면 이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걸핏하면 진영 논리에 빠뜨리고 경계를 지어 상대를 가둬버릴 생각만 한다. 맹그로브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맹그로브 숲이 필요하다.

“맹그로브는 다정하다. 새들에게 둥지로써 새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맹그로브는 정의롭다. 방파제로써 해일 같은 재난을 막아준다. 맹그로브는 독특하다. 소금기가 있는 바다 주변에서도 자란다. 맹그로브는 착하다. 인간이 함부로 마구 배어도 다시 옆에 있어준다. 나도 맹그로브를 닮고 싶다.”

베트남을 방문해서 맹그로브 숲을 본 중학교 1학년 전혜연 양의 소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조유나 양의 소감도 참 살갑다.

“가지는 땅 속으로, 뿌리는 하늘로/물고기는 흙에, 새들은 잎사귀에”

아이들은 그 숲을 통해 지혜를 보고 느끼고 전한다. 어른들도 그 맑고 순수한 눈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걸핏하면 종북이니 수꼴이니 윽박지르며 제 이익만 탐하는 그 속내를 파악하고 그 비겁과 야만을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 맹그로브 숲을 만들어 서로 공존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육지와 바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계를 서로 결코 한발도 넘나들지 못하는 대립이 아니라 서로 보듬고 내주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위헌으로 판정된 경찰버스의 차벽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상처를 보듬는 아량의 숲이 필요한 때다. 나는 무오류고 너희들은 오류투성이라는 유체이탈의 죽은 화법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말로 품어야 한다. 숨을 불어넣는 숲, 무조건적인 대립의 경계가 아니라 양극의 틀을 깨고 서로 손잡고 화해하는 숲이 필요한 때다, 지금이. 송나라 곽희는 산수화를 즐기는 까닭을 바쁜 와중에도 자연의 배움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연에서 배우자. 맹그로브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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