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빼앗은 그들에게 결코 위안을 주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꼭 아베 총리가 사과하는 것을 보고 싶다.”
미국의 유력지인 워싱턴 포스트(WP)는 23일자 신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제목으로 방미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WP는 이 할머니가 26일부터 공식일정이 시작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신이 겪었던 ‘성노예’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러 왔다고 소개하고 “위안부 문제는 크고 성공적인 한인사회로 인해 워싱턴에서 특별한 울림을 일으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기도 했던 이 할머니는 2시간 넘게 이어진 이번 인터뷰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분노와 통한을 쏟아냈다. 1944년 16세 때 대만에 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된 과정과 일본군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강간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이 할머니는 “1943년 10월 어느 날 밤 이웃이 불러 집 밖으로 나갔다가 다른 4명의 여성들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며 “기차와 트럭, 배 등을 옮겨 타며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로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며 “나중에야 대만 신주의 카미가제 부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할머니는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당시 다른 소녀들은 나를 보호해주려고 했다”면서 “나에게 담요를 주면서 ‘죽은 척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결국 커튼이 쳐진 위안소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해 강간을 당했고 이후 성관계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전기 쇼크 등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털어놨다.
이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47년간 아무에게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잃어버렸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수치심을 느꼈고 무서웠으며 외로웠다”며 회한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할머니는 반세기가 지나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1991년에 가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연신 묵주를 돌리던 이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 아베 총리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갑자기 손을 멈추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할머니는 “나는 그들에게 결코 위안을 주고 싶지 않다”며 “그들은 나를 강제로 끌어갔고 행복하게 살고 결혼하고 가족을 가질 권리를 모두 빼앗아버렸다”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한국의 딸이자 숙녀”라고 말한 이 할머니는 “나는 증오하거나 원한을 품고 싶지 않다"며 "그러나 내게 일어난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아베 총리는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 전쟁범죄의 진실을 마주봐야 한다”며 “나는 내 자신과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할머니를 초청한 워싱턴 정신대책위원회의 이정실 회장은 WP에 “우리는 일본을 모욕하거나 공격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위안부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아베 총리가 과거사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이라며 “그러면 우리도 이 모임을 해체하고 앞으로 전진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주미 일본대사관의 마사토 오타카 대변인은 WP에 “일본 정부는 이미 사과와 반성의 입장을 표명했고, 희생자들에게 특별한 펀드를 통해 보상금을 지급했으며, 전직 총리가 개인적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오타카 대변인은 또 “일본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사과했고 최선을 다했다. 희생자들에게 (총리가) 개인적 서한을 보낸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며 “그러나 한국인들은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신지후기자 h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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