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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2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을

입력
2015.04.2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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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가까워지면 으레 매캐한 최루가스가 거리를 뒤덮었다. 늦은 오후 서울 대학로로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사복경찰들이 심심치 않게 불심검문을 벌이더라도 맞서 인권을 따지기 힘들던 시기였다. 90년대 중반, 경찰이 행인을 붙잡은 후 주민등록증을 요구하고 가방을 뒤져도 순순히 지퍼를 열고 입은 닫아야 했다.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아도 조용해야 몸이 편했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먼지로 사라져도 “나만 괜찮으면 됐지”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던 20여 년 전이다.

검문에 붙들렸던 그 날, 경찰의 눈을 붙잡았던 꼬투리는 별 뜻 없이 손에 쥔 빨간 손수건이었다. 아마도 북한산에서 샀던 폭이 넓고 등산로가 그려진 손수건이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디자인이다. 다짜고짜 길을 막아선 경찰은 손수건을 빼앗아 코를 들이댔다. 최루탄 냄새가 배어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어깨에 멨던 가방은 이미 옆에 선 경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공수업 교과서로 쓰이던 사회과학책들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공권력의 편의를 위해 상징만으로 사람을 옭아매던 시절 한 번쯤 겪어봤을 이야기이다.

인권과 안전을 고속성장의 제단에 바쳤던 90년대는 이미 20년이나 지난 과거이다. 하지만 빨간 손수건 따위를 지녔다고 가방이 열리는 식의 부조리는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후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노란 리본을 단 시내 고궁 관광객들의 가방을 열고 불심검문했던 경찰이 1주기를 맞은 지난 주말에도 비슷한 일을 벌였다. 추모 배지를 옷에 단 고등학생을 불러 세워 검문하고 “이런 것 달고 다니지 말라”는 식의 훈계도 더했다고 한다.

2015년에 이르는 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문을 열고, 간통죄가 폐지될 정도로 외관상 우리 사회의 인권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공권력 앞에선 20년 전과 다름 아닌 것이다. 자식을 잃고 1년 동안 찬 바닥에서 밤을 보냈을 세월호 희생자 부모를 시위대라는 죄목을 씌워 진압했던 경찰에게 국제앰네스티는 “모욕적인 처사였다”라고 평했다.

곤궁에 처한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정부의 행태가 지난 20여 년 동안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필이면 가장 아픈 세월호의 상처를 통해 확인하는 요즘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인권, 나아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이 얼마나 미약한 수준이며 변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의 계기였다. 식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시간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갈리게 될 것”이라 말할 정도로 우리의 공동체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들을 서둘러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며, 지난 1년여 동안 수많은 이들이 가슴에 품고 한없이 거듭했던 말. 우리는 결단코 지금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바뀌어야 한다는 외침은 어느 외딴 절벽의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진 것일까. 대통령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를 외면하듯 참사 희생자 유족의 인권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어느 먼 과거에서 날아온 집권자처럼 무정했다. 정부는 약속했던 진상과 책임규명을 위해서 1년 동안 일보 전진도 하지 않은 채 유족을 하루아침에 돈밖에 모르는 무리로 그려내기까지 했다.

인간의 생명과 권리가 어떻게 한순간에 심연으로 사라질 수 있는지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희생자들의 황망한 부표가 맹골수도에 묶여있던 1년 동안 모든 것은 제자리였다. 얼마 전 제주 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한 세월호 참사 추모 미사에서 “3월 로마에서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월호 해결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을 하며 너무 부끄러웠다”고 털어놨다. 20년 전 인권의 잣대가 여전히 통용되는 사회에서 불과 1년 만에 대단한 변화를 기대하는 건 욕심인가 보다.

양홍주 경제부 차장대우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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