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항변' 27일 재판에 관심 집중
성공하면 사형 대신 정신병원 가능성
흉악범 1% 미만 신청 극소수 인정
2012년 7월 20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상영하던 미국 콜로라도주 오로라시의 ‘센추리 16’ 영화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영화 속 사운드가 아니었다. 관객들은 곧 실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깜깜한 영화관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격에 속수무책이었다. 12명이 숨졌고 70명이 다쳤다. 범인은 방금 전까지 관객석에 앉아 있던 20대 청년 제임스 홈스. 그는 영화를 30분쯤 보다 밖으로 나갔고 이내 자신의 차에서 무장하고 돌아와 연막탄을 터뜨리고 관객들을 향해 총을 쐈다.
범행 동기는 분명치 않다. 콜로라도대 대학원에서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밟다 사건 직전 학교를 그만둔 게 특이점의 다였다. 빨간색으로 염색한 홈스가 경찰에서 “내가 (배트맨 영화 속) 조커다”라고 주장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신이상자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홈스 치료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가 사건 발생 6주 전에 그가 다니던 대학에 “홈스는 위험인물”이라고 경고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3년 전 오로라 영화관 총기난사 사건에 미국 언론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쏠리고 있다. 오는 27일 열리는 홈스 재판에서 홈스 측이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을 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무죄가 인정되면 사형을 피하는 대신 평생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앞서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피해자 유족들도 사형을 원하고 있다.
피고인의 정신장애를 내세워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은 그 논란의 역사가 길다.
CNN 법률 자문인 대니 세바요스 변호사는 최근 기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이 일반적이고 성공률도 높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피고인이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을 하는 경우는 흉악 범죄자의 1% 미만에 그치고, 이중에서도 소수만 무죄로 인정 받는다. 2006년 미국사법통계국 보고서에서 미국 수감자의 절반, 130만명 가량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극히 일부인 셈이다.
우선 정신장애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을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데 애로사항이 크다. 정신의학은 천문학이나 생물학처럼 명증한 과학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법정에 판단 근거로 제출할 수 있는 정신장애 측정 도구를 개발해 왔다. 1843년 개발된 맥노튼 규칙은 과학적 정신감정 기준의 효시로 평가 받는다. 살인을 저질렀지만 망상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무혐의로 풀려난 대니얼 맥노튼 사건이 계기가 됐다.
맥노튼 사건을 담당했던 영국 판사들은 “심신장애를 이유로 범죄의 무죄를 주장하려면, 범죄 당시 피고인이 정신상의 질병으로 인해 심신에 결함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성질을 알지 못하고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또는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크리스 카일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에디 레이 라우스에 대한 올 2월 재판에서도 라우스 측은 범행 당시 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선고됐다. 검찰이 라우스를 “문제 많은 마약쟁이”라며 “범행 당시에도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상태”라고 주장한 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현재 미국 내 50개 주 가운데 46개 주가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을 법정에서 근거로 채택하고 있고, 이중 45개 주가 정신장애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맥노튼 규칙 또는 미국 각 주의 성문 형법전의 규범이 되는 모범형법전 테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모범형법전 테스트는 “만약 피고인이 범죄 행위 당시 심신상실이나 심신박약으로 자기 행위의 범죄성 또는 자신의 행위가 법률상의 범죄구성요건에 부합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 결여된 경우”에만 형사상 책임으로부터 변호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을 법정에서 찾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런 변론이 죄를 지은 만큼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정의라고 여기는 국민 법감정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이 처벌과 치료가 동시에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사회와 법의 합리적 타협’임에도 불구하고 인정되는 확률이 크게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62년 미국법률협회(ALI)가 내놓은 정신장애 테스트가 얼마 안 가 사라진 것도 이런 ‘법감정의 벽’에 막혔기 때문이다. ALI 테스트를 근거로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암살 시도 사건의 범인 존 힌클리가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 ‘자기애 인격장애’ 진단을 받은 힌클리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10대 매춘부로 등장하는 조디 포스터에 빠져 있었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미국 일부 주에서는 심신장애가 피고인의 형사상 책임 경감 요인이 되지 않는다. 몬태나주는 형사재판에서 심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을 첫 번째로 폐지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에 비춰 오로라 영화관 총기난사 사건이 피고인의 무죄로 끝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아메리칸 스나이퍼 재판 사례에서 보듯이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대형 재판에서 특히 정신장애로 인한 무죄항변은 성공하기 힘들다”고 전했다.
정신장애에 따른 무죄항변이 성공한 사례는 2001년 6월 갓난아이와 2, 3, 5, 7세 자녀 5명을 집 욕조에 익사시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를 받은 ‘무정한 엄마’ 안드레아 예이츠 사건이 대표적이다. 예이츠의 항소심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예이츠가 심한 산후 정신이상을 겪고 있어 마귀가 자신 안에 있으며, 자녀들을 지옥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