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반(反)예술이다. 철저히 산업화했다. 쓸모만 좇는 무리가 속류다. 인문은 내쫓겼다. 돈 버는 일이 급하고 유일한 건 문화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에게 어떤 선의가 있겠나.
“지난 4월 1일은 우주피스(Uzupis)공화국 독립 기념일이었다.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 외곽의 작은 예술인마을. 1997년 그날 마을 주민들이 만우절 농담처럼 독립을 선포한 이래 매년 만우절마다 장처럼 서고 지는 공화국이 됐다. (…) 원래는 수세기 유대인 마을이었고, 게토였다. (…) 그 마을을 살려낸 건 90년대 들면서 하나 둘 스며든 동구의 가난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깃들인 빈 집을 치워 연극을 하고, 문패 대신 그림을 내걸고, 음악회로 모이고 춤판을 벌였다. (…) 그들은 일체의 상업 시설을 들이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했다. 우주피스는 국민의 빈둥거릴 권리(제9조)를 헌법으로 보장한 최초의, 아직은 유일한 국가다. 하지만 위태로운 국가다. 국가란 게 어차피 정의나 덕이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기구이고, 민주주의란 것도 근본적으론 인간 불신에 기반한 이념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 인간의 이기심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되게 고안된 시스템이다. (…) 한 중견 탤런트와 유명 가수가 서울에서 가장 신진대사가 빠르다는, 용산구에 각각 건물을 각각 사들여 세입자 퇴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영세업자들은 오래 터 닦은 지역을 떠나게 됐고,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왔다는 한 카페 역시 곤란한 처지에 몰린 모양이다. 상가 권리금을 보호해줄 법이 없으니 호소할 데라곤 선의 밖에 없다. 하지만 선의란 믿음직한 버팀목이 아니고, 법의 부실함이 사적 선의를 요구할 근거일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안다.”
-헐한 땅, 헐한 꿈(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 예술은 기존의 산업과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와 이윤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다. 스티브 잡스는 또한 창의성과 혁신의 기반이 인문학이라고 설파하곤 했다. (…) 그러나 그런 바람과 풍경은 예술과 인문학이라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의미있는 두 가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기반으로 한다.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로 최대한의 쓸모를 뽑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요약하자면 예술과 인문학은 인간이 돈 되는 일보다는 돈 안 되는 일을 위해 살도록, 돈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에 좀 더 정신을 팔고 용감하게 좇도록 한다. (…)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고 쓸모있는 일에만 제 시간과 능력을 바치는, 노예적 삶의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대두되고, 자본주의의 후기에 이르러선 그런 삶의 태도로 무장한 노예들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지배계급으로 군림한다. 급기야 예술과 인문학은 그런 노예적 삶의 효율과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 (…) 예술의 쓸모와 관련하여 근래 한국에서 가장 대대적인 위력을 발휘해온 건 한류다. (…) 바로 이 순간 좀 더 높은 임대수익을 위해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는 근사한 예술 공간을 용역을 동원해 내쫓으려는 건물주는 다름 아닌 ‘문화대통령’ 싸이다. 예술의 쓸모를 강조하고 쓸모의 도구로 삼는 일이 예술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예술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삶이란 또한 얼마나 황폐한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목도한다.”
-쓸모없는 예술(4월 21일자 경향신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ㆍ‘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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