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매우 어린 아이들, 이를 테면 만 1~3세 아이들을 자주 진료한다. 이전에는 주로 말이 느리거나 상호작용이 느려 발달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부모들이 많았다면 요즘은 다양한 사건이나 사고 이후 아이들의 행동, 감정 표현이 달라졌다고 진료하는 경우가 잦다.
즐거운 나들이에서 친구가 개에 물리는 장면을 보고 난 후 집을 나가지 않으려는 아이,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에 물건을 던지는 행동을 반복하고 잠을 잘 수 없는 아이,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어머니를 3개월이나 보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 퇴원한 엄마를 볼 때마다 때리고 화를 내는 아이 등. 예전에는 사건이나 사고 이후 아이들의 신체 건강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요즘은 마음건강에도 부모들이 신경 쓰는 게 진료현장에서도 느껴진다. 미리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
트라우마란 몸과 마음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들이고 이런 일을 경험하는 우리는 누구나 정상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이 스트레스 반응이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지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외상후 스트레스가 지속되어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만 5세 미만의 말도 잘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무슨 트라우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해도 아이들은 영향을 받는다. 영유아의 트라우마라고 하면 이제까지는 주로 학대나 방임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최근에는 학대나 방임 이외에도 다양한 트라우마에 대해 관심이 늘고 있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사망, 질병, 교통사고, 폭력 등 모두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반복적인 트라우마는 아이들의 뇌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의 뇌기능은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기능이 먼저 발달하고 그 다음에 언어기능이, 이후에 고위인지기능이 발달한다. 고위인지기능이 발달하기 이전에 경험한 반복적인 트라우마는 지속적인 불안 반응을 일으키고 이는 ‘감정뇌’라고 알려진 편도체를 과잉으로 자극시킨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아이가 도움을 받지 못하면 감정뇌의 과잉활성화가 계속되어 생각, 판단, 충동조절을 담당하는 ‘인지뇌’인 전두엽의 발달이 영향을 받는다.
영유아가 트라우마를 경험할 때 보이는 반응은 어른이나 청소년과는 다르고 연령이나 발달 단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영유아들은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난 뒤 예민해지고 짜증 내거나 잠자는 패턴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이보다 어린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밤에 소변을 지리고 손가락을 빨거나 애기 말투를 흉내 내기도 한다. 가족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자주 울거나 산만하고 행동이 거칠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행동과 반응이다. 아이를 안심시키고 다독거리며 안정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트라우마 상황에서 어른도 당황하고 힘들지만 빨리 추스르는 것이 아이를 위해 필요하다. 16세가 되기까지 25%의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한 번 이상 경험한다고 한다. 우리 인생에서 어쩌면 크고 작은 트라우마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크게 상처받거나 다치는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만약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의 면역력, 마음의 맷집이라고도 불린다. 인생에서 좋은 일, 나쁜 일을 겪으며 극복해가는 힘을 말하는데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힘이 있다. 그리고 어른들의 안정적인 반응과 보살핌이 더해진다면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회복하고 외상후 성장을 경험한다. 말을 못하고 행동으로만 표현하는 영유아들의 마음의 고통에 어른들이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가져야 한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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