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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이 무너지고 있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대로

입력
2015.04.2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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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연구와 비평 역할 축소 지적

"한국ㆍ영국뿐 아닌 전 세계 대학서 최신 건물만 빛나고 인문학은 멸종"

테리 이글턴이 2010년 한국 방문 때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테리 이글턴이 2010년 한국 방문 때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문학적 비평의 중심인 대학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미국도 영국도 한국도.”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73) 랭카스터대 교수가 최근 미국 대학교육 전문 온라인 매체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기고에서 시장에 종속돼 연구와 비판정신을 잃어가는 세계 각국의 대학을 한국까지 예로 들어 비판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글턴 교수는 지난 6일 ‘서서히 죽어가는 대학’(The Slow Death of the University)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오늘날 실용 교육은 역사적 이상과 조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에라스무스와 존 밀턴, 아인슈타인 등을 배출해낸 세계의 유수한 교육기관은 이제 세계자본주의의 무감각한 일면에 굴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글턴 교수는 몇 해 전 한국 대학을 방문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아시아의 크고 발달된 대학을 방문했지만 캠퍼스에는 그 어떤 비평적 연구기관도 없었다”며 “그 대학 안에는 새로 지은 최신식 건물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글턴 교수는 2010년 9월 고려대 영미문화연구소가 주관한 ‘해외석학 인문강좌’ 강연을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

이글턴 교수는 이어 비평과 연구가 중심이 돼야 할 대학이 제 몫을 하지 못 하는 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가 태어나 교육 받은 영국의 대학도 8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졌지만 이제 영국에서 대학은 상아탑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조롱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이글턴 교수는 “대학은 자신들이 이 사회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주장하지만 단기적이고 실용적 면에 광적으로 몰두하고 있다”며 “이는 비단 한국이나 영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이글턴 교수는 스탠포드와 MIT 등 미국의 유수한 대학도 이미 기업가 대학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영국 상류층의 전통적인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몇 해 전 옥스퍼드대 학과장에서 사임한 일을 소개하며 “옥스퍼드는 나에게 학자보다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행동하기를 기대했다”고 말했다.

이글턴 교수는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한데 부르는 말) 대학은 정원의 꽃을 어떻게 키울지, 교수 휴게실에 누구의 초상화를 걸지에 집중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내 도서관보다는 와인 셀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판의 중심이던 대학 그리고 그 핵심인 인문학은 멸종상태에 이르렀다”며 “비판주의 없이도 자본주의는 잘 굴러가고 이것이 자본가들과 지배자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글턴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ㆍ문화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가정에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학위를 딴 뒤 그곳에서 잠시 가르치다 옥스퍼드대로 옮겨 오랫동안 재직했다. 이후 맨체스터대를 거쳐 아일랜드 국립대, 랭커스터대, 미국 노터데임대 등에서도 강의했다. 스승인 레이먼드 윌리엄스(1988년 타계)를 이어 마르크스주의 문학ㆍ문화이론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과 사회 참여 활동을 해왔다. 논리적이면서도 위트를 겸한 논쟁가로도 유명하다. 저서 ‘비평과 이데올로기’ ‘신을 옹호하다’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 등 여러 권이 국내 번역돼 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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