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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여전히 시린 봄, 4월

입력
2015.04.1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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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춥다. 봄이 왔다고 일부러 호들갑을 떨기도 했는데 여전히 등줄기에 서린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만개했던 봄꽃들은 향기를 잃고 이제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뒹군다. 간간히 어깨에 내려앉기도 했던 따사로운 햇살도 이 서러운 봄날의 한기를 달래주지 못한다. 봄은 봄인데 봄날이 아닌 시린 4월인 것이다.

어인 일일까.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4월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스산한 기운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변과 거리의 많은 사람들도 같은 느낌을 호소하며 침울한 봄날을 보내고 있다. 나만의 오한이 아닌 것이다.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아마도 1년 전 4월 ‘그날’ 이후 늘 가슴 한 쪽에 뾰족한 얼음 조각을 꽂아두고 있었나 보다. 지금껏 녹지 않은 채 몸집을 키운 얼음조각이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가슴을 헤집고 있었던 것이 오한의 원인인 것이다. 그 상태로 두 번째 4월 16일을 보내야 했다. 바뀐 것 하나 없이 계절은 시린 세월이 되어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

얼마 전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도 땅의 한 깊은 산골 마을로 귀농해 ‘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러 나선 길이었다. 이웃이라고는 모두가 연로한 노인들뿐(?)이라는데 서로 ‘의지하면서’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왠지 마음이 끌렸다. 이왕 가는 김에 마을 어른들의 나중을 위한 초상사진도 찍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아울러 전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기 마련이니 혹시나 몸에 배인 한기를 털어낼 뜨끈뜨끈한 기운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은 것은 당연했다. 6시간 가까이 걸린 열차시간 내내 창문 밖 들녘의 개나리, 진달래를 비롯한 온갖 봄의 전령들이 춤을 추며 유혹했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착한 ‘어시랑’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작은 산동네였다. 30여 호도 안 되는 가옥들로 보아 뭐 숨기거나 가릴 것 없는 모두가 이웃이요 식구들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두 아들의 천진난만한 재롱과 순박하고 정갈한 ‘청라’씨네 가족과의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편안했다. 서울에서 ‘사진사’ 한 사람이 찾아와 어른들 사진을 찍어 드린다는 소식이 이미 퍼진 탓인지 방글방글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동네 어른들의 인사에 절로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굳어진 어깨가 점차 풀리는 느낌이랄까. 뜨끈하게 데워진 온돌방에서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봄내음 가득한 나물밥상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뒤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겨우내 잠자던 고랑을 매거나 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 할머니들에게 부지런히 인사를 하며 낯을 익히다가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는 94세의 ‘동래’ 할머니 집을 찾아갔다. 완전히 허리가 꼬부라져 농사일을 못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할머니는 평소에도 마당의 꽃을 가꾸거나 다른 이웃의 집을 오가며 노는 재미로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왕 찍을 사진 분홍빛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떡 앉으신 동래 할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는 게 아닌가. 손바닥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데 오히려 옆에 함께 있는 동네 할머니들이 웃으며 난리를 치신다.

“오메! 우리 할망 또 막뚱이 생각나셨능가 비네! 아따 그만 그치쇼잉.”

영문을 모르는 내게 이웃인 ‘광덕’ 할머니가 설명을 해준다. 6남매를 두었던 동래 할머니가 오래 전에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었는데 아마도 사진사 양반 보더니 얼추 또래로 보여 눈물이 났을 것이라고. 거기에 사진 찍어 선물까지 준다고 하니 더 고마워서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시는 거라는 얘기였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심정은 결코 땅에 묻힐 수가 없는 것이려나.

아련한 마음에 동래 할머니의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보다 못한 해결사(?) 광덕 할머니가 그 넓은 품으로 동래 할머니의 어깨를 확 감싸 안더니 고개를 들이밀어 마구 껴안기 시작하셨다. 세월에 쪼그라든 동래 할머니의 작은 어깨는 이젠 웃어보라는 광덕 할머니의 너털웃음 속으로 쏘옥 밀려들어갔다. 순간 코끝이 찡해지면서 달달한 감동과 함께 온몸이 후끈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 속에서 문득 ‘위안이 되는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무궁화 열차 바깥 봄기운의 유혹은 여전했고 처음과는 달리 못이기는 척 가슴을 열어주기도 했다. 한 산골짝에서 우연히 본 따뜻한 풍경에 몸이 한가득 데워진 탓이었으리라.

시린 봄날 한가운데에서 하얀 국화꽃을 들고 다시 맴돈다. 단지 원하는 것은 ‘왜’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마음을 다한 화답일 뿐이다. 저 남도 앞바다에 묻혀 그리고 차디찬 광화문 광장에 누워 노란 피멍으로 물들어가는 이들에, 가슴을 채워주는 위안과 ‘진실’을 향한 공감이 ‘봄볕’처럼 쏟아지기 바랄 뿐이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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