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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 본 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포로들은 철조망을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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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서 본 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포로들은 철조망을 뚫고…

입력
2015.04.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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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지음 | 윤석영 옮김 박하 발행 | 424쪽 | 1만2,500원
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지음 | 윤석영 옮김 박하 발행 | 424쪽 | 1만2,500원

꿈에 미친 걸까, 자유에 미친 걸까. 여기 매력적인 미치광이들이 있다. 산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나머지 수용소를 탈출해 정상을 정복하고 제자리로 돌아온 전쟁 포로들.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 속의 사람들 같지만 실존 인물들이다. 이 책을 쓴 펠리체 베누치가 주모자다.

황당무계한 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 케냐 제354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 식민지청 공무원으로 이디오피아에 파견됐다가 영국군 포로 신세가 된 베누치는 끔찍하게 지루하고 암담한 수용소 생활을 하던 어느 아침, 오랫동안 구름과 안개에 가려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케냐산 바티안봉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다.

그에겐 운명이었다. 베누치는 열렬한 산악인이었던 부모 덕에 어릴 적부터 줄리안 알프스(옛 유고슬라비아 북서부와 이탈리아 북동부로 펼쳐진 동부 알프스 산맥)와 이탈리아 북부 산맥인 돌로미테를 오르내렸다. 케냐산과 사랑에 빠진 그는 당장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수용소를 탈출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철조망을 넘어도 마땅히 도망갈 곳이 없으니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탈출만 하면 숨어 지낼 곳 천지인 유럽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문제는 수용소에서 어떻게 나오느냐가 아니라 온갖 맹수들이 우글대는 야생을 뚫고 여름에도 빙하가 녹지 않는 정상까지 어떻게 오르느냐였다.

등반 장비를 구하는 것도 식량을 비축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모한 계획에 동참할 ‘미친놈들’을 찾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등반에 동참하기로 했으나 다른 포로들의 꾀임에 넘어가 탈출을 시도했다가 하루 만에 잡혀 들어온 이도 있었고, 수용소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며 결정을 번복한 이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귀안과 엔초라는 동료 2명을 끌어들인 베누치는 고철과 넝마, 잡동사니들을 줍고 훔치고 뺏어서 등산 장비를 직접 만드는 한편 식량을 비축한 끝에 탈출을 감행한다. 14일 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쪽지를 남겨 놓고.

2년 만에 다시 만난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다.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세 남자는 외친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즐거움의 대가가 28일 감방 생활에 불과하다니. 믿어지지 않아!” “나는 56일 동안이라도 기꺼이 있겠어.” “난 120일.”

원정대는 표범과 사자, 코뿔소가 언제 덮칠지 모른다는 공포와 고소증세, 식량 부족, 영하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면서 점점 정상에 가까이 다가간다. 산세가 험난한 바티안봉(5,199m)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내려온 베누치와 귀안은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는 엔초를 놔두고 다시 레나나봉(4,985m)으로 향한다. 1월 24일 수용소를 나선 이들이 정상에 이탈리아 국기를 꽂은 것은 2월 6일. 꿈을 이뤘지만 베누치에겐 감격보다 아쉬움이 더 컸다. 바티안봉에 오르지 못해서였다.

베누치가 케냐 포로수용소에서 바라본 케냐산 바티안봉을 그린 그림. 푸른 빛 빙하를 두른 해발 5,200m의 산을 본 뒤 그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박하 제공
베누치가 케냐 포로수용소에서 바라본 케냐산 바티안봉을 그린 그림. 푸른 빛 빙하를 두른 해발 5,200m의 산을 본 뒤 그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박하 제공

명랑하게 수용소로 돌아온 이들은 ‘스포츠 정신’을 인정 받아 단 7일만 감방에 갇힌 뒤 풀려났다. 1946년 본국으로 귀환한 베누치는 이듬해 산악 논픽션의 고전이 된 이 책을 펴냈고 외교관이 돼 세계 곳곳의 산에 올랐다.

목숨을 걸고 감행한 모험인데도 베누치는 좀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늘 차분하고 낙천적이며 유쾌하다. 유머와 낙천이야말로 그의 도전을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일등공신이다. 쿨한 이 남자는 정상에 오른 뒤의 감격도 요란하고 장황한 수사 대신 짤막한 사실 전달로 대신한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자에겐 세상의 어떤 위험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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