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말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해한다고’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BC 525~426)의 비문(碑文)에 씌어진 내용의 일부다. 소포클레스(BC 496~406), 에우리피데스(BC 484~406)와 함께 아테네 3대 비극(悲劇) 작가로 알려진 인물.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그의 비문에는 전쟁무용담도 적지 않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은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던 그의 삶에 비추어,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의해 지배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죽은 제갈량(諸葛亮)이 산 사마의(司馬懿)를 물리쳤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소설은 소설일 뿐.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가 즉각 공격에 나섰으나 사후를 대비한 제갈량의 작전과 계책으로 전투에서 패했다 정도가 역사적 사실이다. 소설이 주는 메시지의 의미가 크다. 방심하고 마구 공격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했다. 냉정하고 치밀한 사마의였지만 제갈량이 생전에 남겨둔 ‘방어의 증거들’을 확인하고 크게 놀라 거의 멘붕 상태에 빠져 한동안 헤매게 된다.
▦‘연예인 리스트’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2009년 3월 촉망 받던 젊은 연예인이 자살했다. 몇 일 후 편지형식으로 된 그의 유서를 모 방송사가 입수해 공개했다. 생업을 유지하기 위해 당했던 성적 수모들을 폭로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인사의 이름을 나열했다. 리스트에는 연예인에 대해 ‘갑(甲)질’을 할 수 있었던 광고주 기업인, 언론사 간부 등의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국회에서까지 진상을 규명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흐지부지됐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자조만 남겼다.
▦‘성완종 리스트’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고인은 죽음을 결심하면서 수많은 ‘방어의 증거들’을 곳곳에 장치해 놓았다. 구속될 것으로 알고 방심했던 리스트 인물들은 멘붕 상태에 빠져 어제오늘, 아침저녁으로 말들이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갑 중의 갑’이다. 갑의 위세를 계속 누리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비극이다. 옛 비극 작가의 비문을 다시 생각한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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