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29일 충북 천안 우정공무원교육원에서 국내 원자력발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공론조사’가 진행됐습니다. 대상이 된 일반인들은 지역, 성별, 나이, 원자력 관련 평소 견해 등을 고려해 175명을 표본 추출했습니다.
이들은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남은 방사성폐기물인 ‘사용후 핵연료’에 대해 1박 2일 동안 전문지식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심도 있는 토론을 거친 뒤 설문조사를 통해 향후 정부가 수립할 사용후 핵연료 관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냈습니다.
한국일보는 공론조사가 진행되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이 같은 방식과 의미 등을 취재한 다음 공식적인 최종 결과가 나온 직후 기사화했습니다(4월 7일자 한국일보 16면▶ 기사보기). 이번 공론조사에 참여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 조사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바뀐 점은 비용 부담 부분 이었습니다.
사용후 핵연료 관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는데 대해 참가자들의 68.2%가 동의했는데, 이는 조사 전보다 8.8%포인트 높은 수치입니다. 이 비용이 만약 전기요금에 부과된다면 5~10% 정도 요금 인상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자가 조사 전보다 28.7%포인트나 늘어 61.3%를 기록했습니다.
공론조사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선발된 사람들에게 특정 정부 정책이나 사회 이슈 등에 대해 폭넓게 배우고 깊이 생각할 시간을 제공한 다음 의견을 제시하게 하는 통계학, 사회학 분야의 여론조사 방법입니다. 해당 정책이나 이슈에 대해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인들이 숙고한 끝에 내놓은 조언은 정책 입안자나 이슈 당사자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 자료가 됩니다. 특히 나라 전체의 안전과 직결된 원자력 이슈에 대한 공론조사 결과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공론조사 진행 주체인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는 웬일인지 공론조사 결과를 공개하는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흔한 보도자료나 브리핑도 없이 조사 결과를 요약한 문서를 위원회 홈페이지에 ‘조용히’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평소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위원회 활동을 유심히 지켜봐 온 사람이 아니라면 공론조사가 이뤄진 사실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대학생이나 전문가들이 참석한 일반적인 토론회, 세미나 등은 일일이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적극적으로 알렸던 위원회의 지난 홍보 방식을 감안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공론조사 절차에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공론조사 현장에 직접 참석해 조사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니터링 한 로버트 러스킨 미국 텍사스대 교수가 한국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조사 절차상 큰 문제는 없었으며, 일반인에게 기술적 깊이가 있는 주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뒤 숙고를 거친 의견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정부가 눈여겨봐야 한다”고 평가했으니 말입니다. 러스킨 교수는 여론조사 분야의 권위자이자 공론조사를 창시한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위원회가 공론조사 결과를 적극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절차상 문제가 아닌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 내용 중 사용후 핵연료를 영구적으로 처분하기 전 장기간 보관하는데 필요한 별도의 시설, 이른바 중간저장시설을 현재의 원전 울타리 안에 두는 게 바람직한지, 아니면 원전 밖 다른 곳에 짓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견해가 포함돼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위원회가 조사 결과 공개에 적극적이지 못한 주요 이유일 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홈페이지에 위원회가 공개해 놓은 공론조사 결과 요약본에 중간저장시설과 관련된 부분이 쏙 빠져 있다는 점이 이런 추측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중간저장시설을 원전 안에 둘 건지 밖에 둘 건지 여부는 현재 원전 소재지 지자체나 주민들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위원회 위원 중 상당수는 원전 소재지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당연히 이들 위원은 지역 여론의 동향에 늘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 여론을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이기도 합니다.
위원회는 공론조사 결과 중 중간저장시설 내용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 홈페이지 요약문에밝혀 놓았습니다. 내용은 “사용후 핵연료를 임시 저장하고 있는 원전 소재 지역을 대상으로 현재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와 별개로 구성된) 원전소재지역특별위원회에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어 원전 주변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한 이후 게재할 예정”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통계적 방법에 따라 표본으로 추출된 일반 국민의 의견이 특정 저장 방식을 지지하거나 반대 쪽으로 나왔다고 해서 현재 원전 소재 지역 주민들 다수가 이 영향을 받아 갑작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바꾸거나 답변을 본의와 다르게 할 것으로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공론조사 결과와 원전 소재지 주민들의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면 오히려 치열한 공론화 과정은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사용후핵연료를 둘러싼 각계각층의 의견 대립과 갈등, 오해 등을 수면 위로 꺼내 건전하고 공정하며 깊이를 갖춘 토론이 이뤄지도록 이끄는 게 바로 공론화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원자력 정책을 비롯한 국내 원전 관련 이슈에서 늘 가장 큰 문제로 제기돼 왔던 부분이 투명성입니다. 의사결정 절차나 사고수습 과정 등을 국민에게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공개와 불투명성이 원자력 종사자나 정책 결정자들에 대한 해묵은 불신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공론화위원회는 다시 이를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국민의 세금 약 1억700만원을 써서 국민들을 직접 참여시켜 도출해낸 공론조사 결과는 마땅히 국민에게 모두 공개해야 합니다. 혹여 일부 위원들의 반대가 있거나 일부 지역에 미칠 파장과 갈등이 우려되더라도 투명하게 알리는 게 우선입니다. 그게 지난해 43억원, 올해 38억원(6월 위원회 종료 이후 정부의 관련 정책 수립 예산 포함)을 쓰는 위원회 의무입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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