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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상처

입력
2015.04.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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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빙이라는 태풍 때문에 남해안 곳곳 피해가 컸다. 피해를 입은 학생들에게는 지원을 해주겠으니 확인 서류를 학교에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수업을 빠지고 광주에서 여수까지 내려갔다 왔다. 며칠 뒤 행정실에서 부르더니 내가 낸 서류에 원하는 양식과는 다른 날짜가 적혀있다며 해당 관공서에서 새로 해오라고 했다. 지우고 고쳐 쓴 다음 사인이나 도장을 찍으면 될 정도인데 굳이 통째로 다시 만들어오라는 것이다. 또 여수 다녀오기가 부담스러워 나는 포기했다.

시간이 지난 뒤, 서류를 제대로 낸 친구들은 얇은 공책 몇 개씩을 받았다. 그 애들은 기가 막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개중에는 욕을 하며 찢어버리는 애들도 있었다. 그걸 돈으로 환산해도 서류 만드느라 쓴 돈에 못 미쳤다. 그게 국가가 하는 짓이었는데 그 정도는 사소한 편에 든다. 다음해에 5ㆍ18이 일어났으니까. 아예 총을 쏴서 사람들을 죽였으니까.

더 어렸을 때, 학년 초가 되면 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담임이 집에 피아노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써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자가용, 전축 같은 게 계속 나왔다. 그때마다 몇 개의 손이 올라갔고 아이들은 누가 부자이고 누가 가난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그런 행태는 계속 되었다. 엄마 아빠 이혼한 학생 손들어… 이 얼마나 잔인한 질문과 확인인가.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것도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서조차 이혼 소리가 나올 때면 뜨끔하다. 이 프로를 보고 있을, 편부 편모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쓸쓸하게 살고 있는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새삼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항을 어른들은 너무 쉽게 떠들어버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우울해진다. 저 아이들은 국가와 어른들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나는 5ㆍ18을 겪으며 국가의 잔인한 폭력과 어른의 무능을 실감했다. 그게 걱정되어 고등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꼬박꼬박 가고 있다. 기성세대로서 최소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해서.

홍준표 경남 지사가 보편적급식(급식에 무상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건 정말 이상하다)을 없애고 대신 서민자녀교육지원이라는 시업을 시작한단다. 그런데 신청해야 하는 서류가 무진장 많다. 식비를 내지 않고 급식을 먹거나 서민자녀교육지원을 받으려면 스스로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의 행정은 국민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 서로 거리 두는 짓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다.

충암교 교감은 식당 앞에서 공개적으로 급식비 미납자를 확인하고 밥을 먹지 말라고 했다. 학생들의 반과 이름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경남 새누리당 이성애 도의원은 무상급식을 폐지하지 말아달라는 학부모 요청 문자에 이렇게 답했다. ‘문자 남발할 돈으로 급식비를 내라’ ‘공짜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현명한가’. 이와 관련한 아이들과 부모의 상처를 짐작하기는 너무 쉽다.

옛말에 ‘풍년거지가 더 서럽다’는 게 있다. 풍년이면 얻어먹을 게 한 조각이라도 더 있을 텐데도 더 서러운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고스란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배고픔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것에 우리는 더 고통을 느끼긴 존재들이다.

평화는 평평할 평(平)에 화할 화(和)를 쓴다. 和는 벼 화(禾)에 입 구(口)가 붙은 단어이다. 그러니까 공평하게 밥을 먹는 데서 평화는 시작된다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어른들. 너무 많다. 사람은 모욕당한 것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애들을 쉽게 생각하고 이렇게 상처를 주면 나중에 되돌려 받을 확률 상당히 높다.

어른들은 애들에게 밥을 안 준다. 답배값 때문에 옆 사람에게도 담배 안 준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냥 주었던 것들이 자꾸 없어지는 세상이다. 나빠지고 있다는 소리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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