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덕일의 천고사설] 자살자의 한

입력
2015.04.16 10:53
0 0

우리 선조들은 의외로 자살이 많지 않았다. 자살을 큰 불효로 쳤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자 증자(曾子)에게 전한 내용을 증자의 제자들이 묶은 책이 ‘효경(孝經)’인데, 그 중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몸과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이를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이 기본 처신이었다. 특히 부모가 생존해 있을 경우 자살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형식은 자살이지만 내용은 타살인 경우들이 있다. 광해군 때의 마지막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이 그런 경우다. 사실 광해군이 조금만 긴장했다면 숭명(崇明) 사대주의자들의 쿠데타인 인조반정은 막을 수 있었다. 쿠데타 당일인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이 “오늘 반정에 참가하자”고 권하자 급히 조정에 고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간 빈발했던 고변의 하나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과 박승종이 어수당(魚水堂)에 있던 광해군에게 두세 번 빨리 조사해야 한다고 청하자 비로소 수사를 지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아들 박자흥(朴子興)의 딸, 즉 손녀가 세자빈이었던 박승종은 서인들의 쿠데타 소식을 듣자 아들 자흥과 수구문으로 빠져나갔다. 박승종과 박자흥은 반란 진압을 독려하는 격문을 경기도 내에 띄우고 족부(族父) 안례(安禮)가 군수로 있던 양주(楊州)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진압을 포기했다. 박승종은 영광(靈光) 군수로 나가있는 또 다른 아들 박자응(朴自凝)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 가문이 불행하게도 왕실과 혼인을 해서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죽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면서 “너는 우리를 따라서 자살하지 말고 선조의 제사를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14일 아들 자흥과 광주의 선산에 배알하고 승방(僧房)에 들어가 술에 독약을 타서 마시고 자살했다.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명분을 끌어대어 자결했더라도 옛 사람들의 장렬한 죽음에 비교해 본다면 부족한 점이 있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라고 폄하했지만 박승종은 신하들이 군부(君父)를 내쫓은 반역에 항의하고 두 임금을 모시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비사상을 자결로써 실천한 것이었다.

광해군 정권의 세 실세를 ‘삼창(三昌)’이라고 불렀다.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의 봉호(封號)에 창(昌)자가 들어갔기 때문인데, 이이첨과 유희분이 체포되어 참형 당한 것에 비교하면 박승종은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억울한 자살을 외면하면 하늘이 대신 갚아준다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한풀이 사상이었다.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28일 사망하자 정적인 노론(老論)에서 독살했다는 정조독살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경상도 인동(仁同)의 명가 장시경(張時景)ㆍ현경(玄慶) 부자 등은 그 해 추석날 농민들과 함께 ‘선왕을 살해한 역적들을 제거하겠다’면서 인동 관아를 습격했다. 내친 김에 경상감영까지 점령하고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중도에 저지되자 인동 천생산(天生山)에 올라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했다. 장현경의 부인과 열세 살, 다섯 살 두 딸과 한 살짜리 사내애는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유배 갔다.

순조 9년(1809) 스물두 살이 된 큰 딸은 진영(鎭營)의 한 군졸이 희롱하자 7월 28일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를 본 어머니도 바다에 투신했다. 막내딸까지 뛰어들려 하자 어머니는 “너는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고 말렸다. 이때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丁若鏞)은 ‘고금도 장씨녀에 대한 기사’에서 ‘막내딸이 신고했으나 강진 현감 이건식(李健植)이 전라도의 비장(裨將)에게 천 냥의 뇌물을 주자 관찰사가 없던 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순조실록’에 따르면 이때의 전라감사는 이면응(李冕膺)이었다.

그런데 모녀가 자살한 7월 28일이 되면 매년 큰 바람과 해일이 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장편의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이 모녀의 한을 달래주었다. 억울한 자살을 외면하면 하늘이 분노한다는 선조들의 생각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노론 일당독재 시절도 아닌 21세기에 자살로써 억울함을 호소해 사회가 들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조들에게 부끄럽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