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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에 대리 서명에… 취업규칙 개악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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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에 대리 서명에… 취업규칙 개악 속수무책

입력
2015.04.1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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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간호사 75% "강요 받아"

아시아나는 미리 동의서 작성해 압박

사업장들 불이익 변경 절차 악용

노사정 대타협 협상 결렬되자

정부 오히려 기준 완화 추진 논란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서울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A씨는 올해 초 성과에 따른 임금제도 도입에 찬성한다는 동의서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철야 근무 이후 오전 7시30분에 퇴근하려는 그를 병원 관리자가 붙잡고, 서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간호사의 수 차례 요구에도 A씨가 서명하지 않자 해당 과장이 “충성심이 없냐. 동의서에 서명한 순서대로 인사상 편의를 봐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터라 부담이 컸다. 그는 “취업규칙 변경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은 부서에는 불이익을 주거나 부서장이 물러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고 말했다. 올해 1월 이 병원 간호사 400명을 대상으로 노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5.6%가 ‘부서장의 압박에 의해 서명했다’고 답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병원측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동의하는 서명을 불법ㆍ강제적으로 받아내 노동조건 개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23일부터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서울대병원은 2013년 정부의 ‘방만경영 정상화 계획’에 따라 통상임금 축소, 성과중심 승진제 도입, 청원휴가ㆍ경조금 감축 등을 추진해왔다.

임금체계 등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때 노조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도록 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가 이처럼 일선 사업장에서 편법ㆍ파행 운영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기준을 지금보다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15일 민주노총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개정과 노동기본권 침해 토론회’에서도 이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경북대병원 노조는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 중인 병원 관리자들이 지난해 12월29일 새벽 5시 야간근무자들을 일일이 찾아 서명을 요구했고, 서명할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휴직자에게 전화해 대리서명을 받는가 하면, 병원장이 직원에게 “서명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며 직접 압력을 행사했다는 게 노조측의 설명이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같은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임금피크제 도입, 상여급 지급 기준 변경 동의를 받으면서 사측이 “미동의한 직원은 장려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공지하는 등 서명을 강요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아시아나항공 노조 관계자는 “동의서에 근로자의 성명ㆍ사번ㆍ직책을 쓰게 해 놨는데, 부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전문가들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가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은정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구조조정 엄포를 놓거나, 승진인사를 취소해 승진대상자가 노조를 직접 압박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재계약 서류와 취업규칙 변경서류를 하나로 작성해 서명 받는 경우도 흔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를 논의하던 노사정 대타협 협상이 결렬됐지만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후 추진하겠다”며 사실상 정부 주도로 시행 의사를 밝혔다. 임금피크제 도입,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개편 등을 위해선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 완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김선수 변호사는 “노조 조직률이 10%에 불과한 상황에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기준까지 완화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근로조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마저 제거하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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