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양적완화·제로금리 후폭풍
은행 대출금리마저 마이너스로
포르투갈 중앙은행 "이자 지급" 결정
스페인·이탈리아 은행 비상경영 돌입
상환 채근하고 당국엔 선처 호소
“내 계좌 입출금 명세서를 액자에 넣어 보관할겁니다. 은행이 돈 빌린 사람에게 이자를 주다니요. 정말 살다 보니 별일입니다.”(스페인 방크인테르 은행 대출 고객)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유럽연합(EU)의 대대적인 양적 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이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은행이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유럽지역에서 시중은행의 소비자 대출금리 기준이 되는 유리보(Euriboㆍ유럽 은행간 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유리보에 마진금리를 붙인 실제 대출금리마저 마이너스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13일 “지난해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 조치로 대부분 금리들이 하락세를 보여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대출자에게 이자 지급)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은행은 예금 고객에게는 돈을 맡겨 손해를 끼친 만큼 수수료를 매기고, 돈을 은행 금고에서 빼간 대출고객에게는 이자를 지급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황당한 상황은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위기에 빠졌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대표 사례가 스페인에서 7번째로 큰 방크인테르 은행이다. 이 은행은 2000년대 중반 부동산 폭등시기에 집중적으로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판매했는데, 일부 상품의 경우 마이너스 금리가 되면서 매월 대출원금에서 마이너스 이자만큼을 빼주고 있다.
포르투갈 중앙은행도 최근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즉시 은행은 대출고객에게 이자를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월스트리저널에 따르면 230만건에 달하는 포르투갈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90% 이상이 변동금리 방식이어서, 유리보의 하락추세가 이어질 경우 돈을 빌린 대가로 이자를 챙기는 대출자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쯤 되자,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의 시중은행은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대출고객에 대한 상환 요청을 강화하는 한편 금융 감독당국이나 중앙은행에 ‘꿔준 돈에 이자까지 지급해야 하는 상황만은 막아달라’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 “은행들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금융당국은 원리원칙대로 빌려준 돈에 이자를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금리’사태는 유럽 은행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각 은행들은 부랴부랴 마이너스 금리 상황까지 반영한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거래 약관이나 법률 문서에 대한 재검토 작업도 벌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자를 받을 정도는 아니어도, EU의 양적완화로 유럽 다른 지역의 대출자들의 이자상환 부담도 크게 감소했다”고 전했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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