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히피 가수, 자의식 강한 포크록으로 지각변동
히피정신이란… 세상 만사가 돈 중심으로 움직여
평화·환경문제 세인 관심 적어, 세상 변혁할 사상 접할 기회 놓쳐
근황은, 늦둥이 초등학생 딸 육아에 분주… 40주년 기념앨범·기념공연 준비
거친 모래에 쓸린 듯한 목소리엔 20대 청년 못지않은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광대뼈 주위의 도톰한 살이 미소로 인해 동그랗게 튀어나올 땐 10대 소년의 장난기마저 스쳤다. ‘물 좀 주소’가 포함된 첫 음반 ‘멀고 먼 길’(1974)을 낸 지 40년이 지난 한국 포크록의 거장 한대수(67)는 요즘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2008년부터 7년째 진행중인 CBS 라디오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위해 방송국으로 향하고 오전 11시에 2시간짜리 방송이 끝나면 돌아와 22세 어린 러시아인 아내 옥사나의 식사를 준비하고 초등학생인 늦둥이 딸 양호를 학교에서 데려온 다음 함께 숙제를 한다. 여기에 후배 음악인들과 함께 만든 40주년 기념 앨범 ‘리버스(Rebirth)’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고 이달 말 예정된 40주년 기념 공연도 준비해야 한다.
‘국내 최초의 히피이자 국내 최후의 히피’. 이렇게 불리던 한대수는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삶을 살고 있다. 라디오 방송을 마치자마자 만난 그는 인터뷰 도중 시계를 자꾸 쳐다봤다. 양호 때문이었다. “애 하나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마누라 밥해주고 애 데려오러 얼른 가야 합니다. 자, 다음 질문!”
-요즘도 작곡을 하나?
“작곡이란 게 10, 20대 때 가장 왕성하다. 나뿐 아니라 비틀스,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신중현도 10, 20대에 작곡한 게 반 이상이다.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때다. ‘와 신기하다’ 하면 신기한 것 자체가 음악이 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게 연애다. 10대는 여자 손만 잡아도 흥분이 되지 않나. 그 흥분상태가 30, 40대 되면 없어진다. 그러니까 곡이 잘 안 나오는 거다. 신곡이 이 나이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이번 앨범에는 신곡이 두 개 들어간다.”
-예전에 만들어 놓은 곡이라던데.
“그 중 하나가 ‘My Love’인데, 스무 살 때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공연하던 때 만든 곡이다. 찢어진 청바지 패션이 그때 나왔다. 우리는 한 번 입었다 하면 찢어질 때까지 안 벗었거든. 그것만 입고 자고 하니까 얼마나 냄새가 났겠나. 세시봉에서 DJ를 하는 ‘양호한’(그는 딸 이름이기도 한 이 단어를 인터뷰 내내 반복했다) 여인이 있었는데 자기가 빨아주겠대. 그 여인이 우리집에 가서 방망이로 청바지를 빨아주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노래가 나왔는데 가사가 너무 유치해서 녹음을 안 했다. ‘내 사랑은 꿈 같이 내 옷을 빨아주지요’라니. 이번에 프로듀서 맡은 손무현씨가 이 노래 좋다며 ‘파트 B’를 추가해 완성했다. 또 하나는 ‘I surrender’라는 곡인데 이건 최근 뉴스에서 종교 갈등, 끔찍한 테러들을 보며 ‘우리 모두 패배자다, 우린 승리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최근에 낸 책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을 읽어보니 대부분의 곡이 사랑 경험에서 나왔더라.
“맞다. 사랑 빼면 아침에 일어나 양치하고 출근해서 재미없는 일 하고 집에 와서도 재미없는 TV 보고 잠자는 것뿐이잖아. 사랑의 환희, 그게 인생을 만드는 거다. 나머지 뭐 별 거 없다. 친구들이랑 술 먹어봤자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잖아. 사랑에 빠진다는 건 새로운 세상이다. 그게 없으면 살 가치도 별로 없을 거다.”
-미발표곡이 더 있나.
“이제 없다고 봐야지. 밑바닥까지 긁었다.”
-젊었을 때 더 많은 활동과 작곡을 할걸 하는 후회는 없나.
“앨범 15장에 138곡이면 많이 했다. 밴드도 아니고 혼자 한 게 그 정도다. 후회 없다.”
한대수는 물리학자로 미국 유학을 떠난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연세대 초대학장을 지낸 할아버지 아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햄프셔주립대 수의학과를 중퇴한 뒤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데뷔했다. 한대수의 등장은 가요사에 일대 사건이다. 당시 가요계를 주도한 트로트는 물론, 번안곡을 부른 송창식이나 윤형주와도 전혀 달랐다.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를 연, 한대수의 자의식 넘치는 포크록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1974년 나온 데뷔 앨범 ‘멀고 먼 길’과 이듬해 나온 2집 ‘고무신’은 체제전복적 음악이라는 이유로 전곡이 금지됐고 마스터테이프까지 압수당했다. 첫 아내와 기타 하나 들고 뉴욕으로 떠난 그가 다시 새 앨범을 내기까진 14년이 걸렸다. 1989년 3집 ‘무한대’부터 2006년 ‘욕망’까지 정규 앨범 10장을 더 발표했다.
-전공이 수의학이었다니 뜻밖이다.
“할아버지가 목장 물려준다고 해서. 그런데 못하겠더라고. 너무 어려워. 처음엔 낭만만 생각했지. 말도 타고 친구들이랑 술 먹고 기타 치고 바비큐 파티 하고.”
-음악을 전공하고 싶진 않았나.
“음악가 집안이었지만 기타 치는 걸 나쁘게 보셨다. 할아버지가 미국에 유학 가서 신학을 전공했는데 원래 바이올리니스트셨다. 원래 종교음악을 전공하시려다가 음악을 부전공하고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따셨다. 외가는 사업가 집안이어서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로 싣고 온 피아노가 있었다. 어머니가 당시 거의 유일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가 피아노 치는 걸 본 뒤 집안에 화폐도 남고 인물도 좋고 건강하니 며느리 삼은 거다. 할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하고 어머니는 피아노 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겠나. 어머니 아버지 결혼도 음악 때문이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들었는데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롤링 스톤스, 짐 모리슨(도어스)를 듣다 보니 미치는 거다. ‘야 이거다!’ 답을 찾은 거다.”
-그런 환경에서 음악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미국에서 피터 폴 앤 매리나 밥 딜런 같은 포크가 유행했다. 뉴욕 이스트빌리지도 그렇고 샌프란시스코도 커피숍에 가면 기타를 들고 줄을 서 있다가 한 명씩 무대에 오르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한두 곡 연주하고 모자를 돌려 받은 돈으로 피자도 사 먹고 맥주도 마셨다. 운 좋으면 어떤 여자가 와서 ‘푸지’(일본 후지산에서 따온 명칭으로 동양인을 부르는 이름)라고 부르며 음악이 좋다고 접근한다. 그러면 또 완전히 양호한 밤이 이뤄지는 거지. 아르바이트 하면서 심심하니까 음악을 만들곤 했는데 그러면 (대중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그 심판 받는 게 재밌더라고. 그래서 한국에 와서도 세시봉에 나가서 심판을 받은 거지. 가수가 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게 하필 세시봉 갔던 날 MC가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PD인 이백천씨였다. 나보고 ‘너 내일 내 프로에 나와’라고 해서 하루 사이에 데뷔를 한 거다.”
-세시봉 가수와는 거리가 있는 음악이었다.
“당시엔 트로트가 유행이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기타 치는 음악가들이 있구나 싶어 기뻤다. 근데 그땐 다들 번안곡 했다. 우리하고 상관 없는 걸 한다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느낀 우리 주제를 음악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주입시켰다고 할 수 있다.”
☞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미국 학창 시절 때 히피들과 어울리며 마리화나깨나 피웠을 것 같은데.
“1960년대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마약문화가 형성됐다. 당시 고등학교 남자 화장실에 30명씩 들어가서 마리화나를 피웠다. 규율부장 선생이 잡으려고 와도 문이 안 열릴 정도였다.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왕따 당한다고 봐야지. 그것을 필히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바마도 어릴 때 마리화나를 피웠다고 인정하지 않았나. 그런데 거기서 빠져 나와야지 깊이 들어가면 죽음이다. 이 부분을 잘 교육시켜야 한다. 지금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우리나라 상류층 아이들이 해외 유학 가서 몇 명은 중독자가 돼서 돌아온다. 이런 부분을 열린 마음으로 토론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절제력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절제도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교훈을 주셨다. 한두 번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길로 가면 죽음이라고. 할아버지 말이 맞더라. 내 주위에도 마약을 심하게 해서 죽은 이들이 있었다. 록스타도 많이 죽었잖아.”
-히피정신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나.
“그렇다. 학살 행위를 쳐다보면서 조용히 있는 것도 범죄다. 아우성쳐야 한다. ‘너 이거 뭐 하는 짓이냐’ ‘누가 누구를 죽일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고 자꾸 항의를 해야 한다. 평화운동은 앉아서 하는 게 아니고 계속 말을 하고 주입을 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의 ‘마지막 히피’ 같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요즘엔 평화나 환경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게 돈 중심으로 체계화돼서 그렇다. 한 달에 날아오는 청구서만 20장씩 되니까 사람 미치겠더라. 재수 없이 해고라도 당하면 파산해야지 뭐.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메말라 가는 거다. 봉급 열심히 받아봤자 돈 냄새도 맡아보지 못하고 스윽 지나간다. 자본주의가 가장 쉽게 국민을 조종하는 방법이 신용카드와 대출이다. 돈 갚는 데 정신이 없으니 마르크스를 읽겠나, 촘스키, 체 게바라, 호치민을 읽겠나.”
한대수는 20년 넘게 살던 첫 아내와 이혼한 뒤 4년간 혼자 지내다 1992년 뉴욕에서 만난 러시아인 모델 옥사나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당시 한대수가 44세, 옥사나는 22세였다. 하지만 아내의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혼도 생각했다. 부부 사이를 단단하게 맺어준 건 2007년 태어난 딸 양호였다. 그는 “(아이에게) 내 나머지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한다”고 했다.
-양호는 어떻게 키우고 있나.
“아이를 낳고 자본주의를 알게 됐다. 난 할아버지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돈을 본 적이 없다. 대학에 계시니 사택이 나오고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가정교사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돈 세는 걸 본 적이 없다. 돈이 필요 없으니까. 음악 시작한 뒤에도 돈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다. 그런데 애를 낳으니까 첫날부터 ‘어!’였다. 수술에 산후조리, 거기에 분유 값까지. 그때 한 방 맞았다. 음악에서 버는 돈이 너무 미미한 거다. 그래도 LP 시절 때는 앨범 한 장 내면 1년 살았는데 이젠 아무도 음반을 안 사잖아. 그래서 이탈리아 음식점을 할 뻔도 했다. 다행히 아리랑TV에서 DJ를 하라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돈 욕심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 양호만 잘 키우면 된다. 안타까운 건 양호를 낳으니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면서 ‘나’라는 게 없어졌다는 점이다. 이전만 하더라도 굉장한 에고이스트였거든. 아무래도 음악 하는 사람은 그런 게 다 있다. 자기 잘났으니까 하는 거 아냐. 근데 딱 애를 낳으니까 교육 시스템에 대해 보게 된다. 초등학교가 1년에 2,000만원, 3,000만원 한대. 정신 나갔어? 뭐야 그게.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 그렇게 공부 시켜서 우리나라에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이라도 있어? 평화상 말곤 없잖아.”
-인생에서 가장 양호했던 시절, 가장 불양호했던 때를 꼽는다면.
“불양호했을 때는 바로 말할 수 있다. 군대 3년 3개월. 인간도 아니더라고 내가. 개보다도 못하더라고. 땅바닥을 핥아먹었으니까. 베트남전 때잖아. 얼마나 기합이 셌는데. 하지만 병장 되고 나는 절대 안 때렸다. 내겐 복수심이 없다. 양호한 건 아무래도 결혼식 때네. 두 번 다. 이 여자와 한 평생 같이 산다는 느낌, 영원한 친구라는 느낌에 기뻐서 눈물 많이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살았으니까.”
-현재 삶은 양호한가.
“참 어려운 질문이네. 나는 인생 자체가 양호하지 않다고 생각해. 너무 고통스럽고 역설적이고 인생 자체가 너무 이중적이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인간은 역사를 배웠지만 계속 실수를 반복하고 변함이 없다. 왜 베트남 반전 데모했을 때에 비해 발전이 하나도 없는 걸까. 남녀관계는 왜 이렇게 복잡해졌나. 그런 모든 것이 사실 슬퍼. 양호하지 않아. 양호한 게 있다면 내가 양호를 낳았다는 것이지. 사실 2세를 가질 거라는 기대를 안 했다. 자라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박준호 인턴기자(동국대 불교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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