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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3병 훔친 소년, 법복 입은 또래가 내준 과제 풀며 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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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3병 훔친 소년, 법복 입은 또래가 내준 과제 풀며 새 삶

입력
2015.04.1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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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정법원, 청소년참여법정 첫 공개

-자전거는 본인이 타고 싶어서 훔친 겁니까, 아니면 친구가 원해서 가담했습니까?

“서로… (자전거를 훔쳐) 타려고 했던 마음이 통했습니다.”

-사건 본인이 자신을 소극적인 성격이라 말했는데 어찌 물건 훔칠 때는 용기가 났습니까?’

“친구랑 있어 (그땐) 소심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법복을 입은 학생 8명이 특수절도 혐의로 법정에 선 또래 고교생 A군(16)에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쏟아냈다. 앳된 얼굴의 학생들은 법정과 법복의 무게감 때문인지 A군의 범행이 적힌 사건기록을 꼼꼼히 읽고, 이어 법정에 나타난 A군의 진술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서 생긴 의문점을 깨알같이 써서 법정 진행인에게 제출했다. 질문 세례를 받은 A군은 손으로 이마를 연신 만지며 부끄러운 속내를 청소년 배심원들에게 보였다. 13일 오후 서울가정법원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청소년참여법정의 장면이다.

A군은 지난해 12월 친구와 PC방에 가는 길에 트럭에 실린 맥주를 보고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유혹에 못 이겨 3병을 슬쩍 훔쳤다. 이어 친구는 자전거까지 훔치겠다며 자물쇠를 돌로 내리쳤고 A군은 망을 보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자물쇠가 부서지진 않아 자전거 절도는 미수에 그쳤다. 초범인 A군은 “타인의 재산에 해를 끼쳤고, 해선 안 되는 짓을 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청소년 배심원 미림여고 김은지(17)양은 잘못을 뉘우치는 A군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메모했다. ‘다음에도 같은 상황이 생기면 순간적인 욕심을 어떻게 누를 것이냐’는 청소년 참여인단의 질문에 A군은 “오늘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명심하겠다”고 답하고 법정을 빠져나갔다.

청소년참여법정은 A군처럼 주로 경미한 범행을 처음 저지른 비행 소년을 재판에 넘겨 ‘주홍글씨’를 찍는 대신 교화를 위한 과제를 주고 성실히 이행하면 재판 없이(심리불개시) 풀어주는 제도로 2010년 첫 도입됐다. 정식 재판 절차는 아닌 조사절차의 일환이다. 참여인단으로 선정된 학생 5~9명이 법정에서 비행을 저지른 소년이 17시간 이내로 해낼 수 있는 과제를 선정, 판사에게 건의한다.

또래 배심원들은 이날 ▦자기관찰 보고서와 인생설계도 작성(4시간) ▦후회하는 일과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 쪽지에 적어 냉장고에 붙이기(4시간) ▦인터넷 중독 예방 교육 이수(2시간)를 A군에게 줄 과제로 정했다. 학생 배심원 김은지양은 “소년이 자신의 잘못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성격은 어떤지, 무얼 하고 싶은지를 잘 모르는 듯하다”며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의견을 모았다”고 판사에게 설명했다. 이어 “법정에서 A군 양옆에 앉은 부모와의 관계가 다소 서먹해 보이고, A군이 스마트폰을 매일 3시간 이상 만진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서울가정법원 소년2단독 엄기표 판사는 학생 배심원들의 뜻을 받아들여 A군에게 올해 6월까지 배심원이 정한 것을 포함한 다섯 가지 과제를 이행할 것을 주문했다. 가정법원에 따르면 청소년참여법정 신청은 지난해 118건이었고, 86건(72%)이 심리불개시로 결정됐다. 주어진 과제를 불성실하게 대충 하거나 다른 범행이 추가로 드러나 재판부에 회부된 건은 8건에 그쳤다. 청소년참여법정은 부모 등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열리며, 추후 취소가 가능하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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