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다는 말에 오기로 이 악물어
컴퓨터 세터, 차세대 거포로 성장
"우승 선물 하와이 여행보다 앞으로 훈련이 더 기대 돼"

스포츠 선수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징크스 중 하나가 ‘2년 차 징크스(sophomore jinx)’다. 프로 데뷔 이후 첫 시즌을 잘 보냈다 하더라도 슬럼프는 따라오기 마련. 화려한 데뷔 후에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2년 차라는 것은 그만큼 어떤 선수나 팀에게도 흔들리기 쉬운 시기다.
하지만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은 이 공식을 깨고 창단 2년 만에 ‘무적함대’ 삼성화재를 누르고 챔피언에 오르는 기적을 썼다. 팀의 우승을 이끈 송명근(22), 이민규(23) 역시 이제 겨우 데뷔 2년 차다. 두 선수는 한ㆍ일 V리그 톱매치를 5년 만에 우승으로 장식한 다음날인 13일부터 휴가를 허락 받았다. 7개월 간 펼쳤던 ‘기적의 릴레이’를 공식적으로 종료한 셈이다.
두 선수 모두 올 시즌 이전과 이후 확연히 달라졌다. 이민규는 데뷔 2년 차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출중한 경기 운영을 선보여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민규는 이날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시즌 자신을 가장 자극한 말이 ‘어린 나이에 잘할 수 있겠나’라는 질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 ‘아직 어리다’라는 말에 오기가 생겼다. 어린 것과 실력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힘 줘 말했다. 차세대 토종 거포로 거듭난 송명근 역시 “젊고 경험이 없으면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식을 우리가 완전히 깨버렸다”고 덧붙였다.
챔피언인 만큼 ‘막내 티’를 벗어야 한다는 것에도 이들은 공감했다. 가슴에 우승이라는 ‘별’을 단 만큼, 지킬 것도 많아졌다. 송명근은 “프로에 오니까 어리다고 마냥 봐주는 게 아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민규 역시 “화면에 내 모습이 잡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 있는 행동들을 신경 쓰려고 노력한다. 나이가 많으신 팬들도 의식하게 된다”고 답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김세진 (41) OK저축은행 감독에게서 프로 선수로서의 자세를 배운다는 것이 이민규의 설명이다. 그는 “감독님은 안산 홈 경기에 나설 때는 늘 정장을 입고 출근하도록 한다. 그만큼 팬들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마냥 기뻐하고 있을 시간도 그만큼 짧았다. 벌써부터 다음 시즌에 대한 걱정이 머리 속에 가득한 눈치다. 2015~16시즌에는 삼성화재의 설욕, 현대캐피탈ㆍ대한항공의 부활, LIG손해보험의 도전 등등 그야말로 혈전이 펼쳐질 전망이다. 이민규는 “챔프전 3차전을 끝내고 우승 샴페인을 터뜨렸을 때 정말 기뻤다. 그리고 라커룸에 들어가서 옷장을 여는 순간 ‘다음 시즌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고 털어놨다. 챔피언은 이제 그만큼, 내려가고 싶지 않은 자리가 됐다.
송명근은 우승 선물인 하와이 여행을 눈 앞에 두고도 다음 시즌 훈련을 벌써 기다리고 있다. 한ㆍ일 톱매치가 끝난 직후에도 “앞으로의 훈련이 기대된다”고 했던 그다. 송명근은 “우승의 맛을 봤다. 참고 이겨내면 또 이런 기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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