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하루였다. 모든 사물이 빳빳하게 등을 돌린 듯 집안이 절벽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어떻게든 움찔거려야 ‘소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각이 든 건 밤이 깊어서였다. 돌돌 감고 있던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가 불을 켰다. 묘한 이물감을 느꼈다. 거실을 휘둘러보았다. 한쪽 벽, 내 머리보다 약간 높은 지점에 시커먼 물체가 포착됐다. 바퀴벌레였다. 과장 전혀 안 보태 딱 내 검지만했다. 일순, 움찔했다.
놈을 잡을 도구부터 찾았다. 평소처럼 안 보는 책을 집어던지거나 하는 일은 짓이겨진 사체 처리의 난감함을 떠올리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놈은 이편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이동할 기세였다. 서둘러야 했다. 손에 잡힌 건 에프킬라통이었다. 뿌리는 대신 휘둘렀다. 다행히 빗맞았다. 정타였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혼절해서 바닥에 떨어진 놈을 몇 겹으로 뭉친 휴지로 감싸 바깥에 내던졌다. 벽엔 아무 흔적도 안 남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기분이 냉큼 상쾌해졌다. 이전과는 다른 시공 속에 펼쳐진, 이상한 꿈속으로 들어온 기분. 우울이 꿈이었을까, 바퀴벌레가 꿈이었을까. 생사 확인도 않고 내던진 바퀴벌레는 과연 죽었을까 살았을까. 혹시 그 놈은 내 뜬금없는 우울이 만들어낸 영혼 속 독(毒)의 허상 아니었을까. 난 그날 푹 잘 잤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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