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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아닌 힐링... 엔딩노트 적는 美 10대 말기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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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아닌 힐링... 엔딩노트 적는 美 10대 말기 환자들

입력
2015.04.1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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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 권리 주는 사례 늘어

엔딩노트, 2년간 2만부 배포

통증 관리·장례 방법 스스로 결정

남은 시간 집중할 일 등 선택하며

기억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 그려

악성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10일 사망한 로렌 힐의 지난해 11월 경기 모습. 힐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경기에 출전, 득점을 올리며 활약했다. 그는 또 비영리재단을 세워 소아암 연구 기금 150만달러를 모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연합뉴스
악성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10일 사망한 로렌 힐의 지난해 11월 경기 모습. 힐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경기에 출전, 득점을 올리며 활약했다. 그는 또 비영리재단을 세워 소아암 연구 기금 150만달러를 모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연합뉴스

꿈 많은 미국 10대 소녀 애슐레이 맥헤일(18)은 지난해 7월 어느 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청바지와 크리스마스에 입으려고 사두었던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카우걸 부츠도 신었다. 애슐레이 가족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잘 차린 밥을 먹었다. 메뉴는 멕시코 음식인 스테이크 파히타와 구운 옥수수였다.

이 날은 애슐레이의 장례식이었다. 임종 장소를 병원이 아닌 오클라호마주 카투사 집으로 택한 것이나, 입관할 때 입을 옷과 신발, 가족들의 만찬 아이디어부터 식사 메뉴까지 모두 애슐레이의 ‘작품’이었다.

애슐레이의 모친 론다 맥헤일은 “우리가 이 모든 결정을 해야 했다면 경황이 없어 허둥지둥 했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NYT)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성인 전유물이던 웰다잉, 10대 환자도 관심

미국에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10대 환자들 사이에서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웰다잉은 그 동안 성인 환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환자가 미성년이거나 법적으로 의사결정 권한이 없을 때 의료진은 대개 부모에게 연명치료 여부, 장례 방법 같은 어려운 선택을 넘겼다.

그러나 최근에는 10대 환자들에게 이런 어려운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10일 사망한 미국 여대생 농구선수 로렌 힐도 같은 경우다. 힐은 열아홉 살 때 뇌종양으로 시한부 2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생존률 0%로 수술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농구팀 코치에게 “경기에 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지난해 말 실제로 경기에 선발 출전해 득점까지 올렸다.

지난해 발간된 ‘미국인의 죽음’이라는 보고서에서 소아과 부문을 집필한 파멜라 S. 하인즈 교수는 “청소년 환자들과 얘기하다 보면 의외로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10대 환자들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계획하는데 관여하기를 더 선호하고 그런 개입이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암, 심장병, 선천적 기형으로 인한 10대 사망자 수는 전체 청소년 사망의 11%를 차지한다. 매년 1,700명 수준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이란 화두가 날씨 이야기처럼 가벼울 수는 없는 법이다.

환자나 가족들은 누군가 남은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꺼내면 말을 돌려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대화 자체를 삶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는 신호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10대들이 가족들과 마음을 터놓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미 국립정신건강협회의 정신과 의사 메릴랜드 파오는 “10대 환자들은 가족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속내를 털어 놓기를 편하게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진에게도 10대 환자와 죽음을 주제로 대화하기란 고통스럽기 마찬가지다. 많은 의료진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또 일부는 이런 대화가 청소년들에게 심리적으로 해롭다고 여긴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이런 대화를 회피하면 청소년 환자들의 두려움과 고립감이 오히려 심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12년 조사에서 청소년 에이즈 환자들의 56%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게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답했다.

필라델피아아동병원 완화의료 담당 소아과 의사이자 윤리학자인 크리스 퓨드너는 10대 환자와 가족들이 대화를 하면서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10대 환자들도 금기로 여겨졌던 주제를 입 밖에 내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표현 자체가 치료” 엔딩노트 적기

10대 말기 환자들에게 ‘나의 선택지’(Voicing My Choices)란 엔딩노트를 적으라고 권하는 의료기관이 늘고 있다. 이 노트는 최초로 성인 환자가 아닌 청소년 환자와 그의 부모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졌다. 웰에이징 비영리단체인 ‘존엄하게 나이 들기’ (Aging With Dignity)가 2년 전 제작해 배포한 이후 지금까지 70곳이 넘는 병원과 10대 환자 가족이 2만부 가까이 주문해 사용했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슬로바키아어로 된 번역본도 있다.

나의 선택지 제작에 참여한 사회복지사 로리 와이너 박사는 “나의 선택지는 청소년이 남은 시간에 집중할 일들을 선택하고 인생을 긍정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며 “환자가 자신이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어하는지를 알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의 선택지 작성은 간단하다. 질문을 읽고 해당하는 칸에 표시를 하면 된다. 주관식도 있다. 활동지는 통증 관리 같은 의료적 결정부터 좋아하는 음식과 음악 같은 취향까지 다양하게 묻는다. “나에게 힘과 기쁨을 주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남은 시간 무엇을 용서하고 싶습니까?”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같은 질문도 있다.

애슐레이의 독특한 장례식도 나의 선택지 덕분에 가능했다. 애슐레이가 열일곱 살이던 1년 전, 미국국립보건원(NIH) 병실로 사회복지사가 찾아 왔다. 사회복지사는 애슐레이에게 나의 선택지를 내밀었다.

애슐레이는 핫핑크 색 펜을 들고 “누군가 병문안을 왔는데 내가 자고 있다면 깨워주기를 바라나요?” “방문객이 울고 싶을 땐 병실 밖에서 울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당신과 그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를 바라나요?” “의식을 잃었을 때 생명 유지 장치를 원하나요?” “장례식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컴퓨터는 누가 물려 받기를 원하나요?” “애완견은 어떻게 할까요?” 같은 질문에 열심히 답을 적었다.

“나를 알기 위해 중요하다”라고 시작하는 애슐레이의 나의 선택지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춤추기를 좋아하고 월마트 복도에 앉아 노래 부르기도 좋아한다.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용기 있고, 똑똑하고, 과격하지만 귀엽고 살짝 제정신이 아니다.”

퓨드너 박사는 “청소년기는 자아성찰과 정체성 확립 욕구가 강해 내가 누군지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과정 만으로도 치료가 된다”고 말했다.

네 살 때부터 자가면역질환으로 병원을 오갔던 에린 보일(25)은 최근 죽기 전 “나의 선택지에 내 소원들을 적으면서 마음이 편했고 죽고 난 이후에 대한 걱정 없이 남은 시간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보일의 시신은 고인 뜻대로 NIH에 기증됐다.

어린 환자들의 위대한 유산, 엔딩노트

10대 환자들에게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일의 필요성을 언제,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 지 정해진 기준은 없다. 의료진이나 혹은 사회복지사의 직관과 경험에 맡길 뿐이다. 퓨드너 박사는 소아암 환자들의 경우 예후가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너무 이르게 엔딩노트 이야기를 꺼내면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현장에선 그러나 환자들에게 나의 선택지 같은 엔딩노트를 소개하는 시기가 너무 늦어 문제라고 말한다. 의료진이 미루다 엔딩노트 이야기를 꺼낼 땐 환자들이 이미 무언가를 계획하기엔 상태가 악화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파오 박사는 자신이 상담했던 10대 환자의 보호자 사례를 언급했다. 환자 엄마는 뒤늦게 죽어가는 아들의 꿈이 궁금해졌지만 아들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뒤였다. 환자 엄마는 “아들이 열일곱 살이나 됐지만 우리는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후회했다.

와이너 박사는 그래서 치명적인 질병 진단을 받으면 바로 엔딩노트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자 심리가 안정적이라는 조건 아래서다.

인디애나주 먼시 출신 대학생 칼리 코크와 그의 가족은 엔딩노트를 대하는 좋은 자세의 예다.

지난해 봄, 열아홉 살 칼리는 울혈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고 NIH 집중치료실에 입원했다. 신장 동맥 90%가 망가졌다고 했다. 칼리는 이전에도 4기 림프종과 유전면역체계질환으로 생사를 오갔었다. 언니 켈시는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간의 사정을 잘 아는 병원 상주 심리치료사는 칼리 엄마 타미에게 나의 선택지를 소개했다. 타미에게서 “칼리는 남은 시간을 계획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타미는 칼리 머리맡에 나의 선택지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칼리도 재미있는 놀이로 받아들였다. 그는 “남은 시간을 계획하는 과정은 우울한 일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여러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칼리는 지난해 7월 어려운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다행히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부모는 여전히 칼리의 나의 선택지 사본을 침실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다.

타미는 “우리는 이미 한 번 자식을 앞세워 보내봤다”며 “그 때 그 애가 원했었던 게 진짜 뭔지 궁금했고 그래서 우리는 칼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엔딩노트는 어쩌면 세상에 남은 가족들을 위한 어린 환자들의 위대한 유산일지 모른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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