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구조개혁 추진 중인데… 전문성 없는데 무슨 개혁 하나
2~3%대 저성장 지속, 금리 조금 내린다고 상황 안 변해
공정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성장과 분배의 조화가 중요"
이준구(66) 서울대 명예교수는 ‘백발의 소년’이다. 제자들이 선물한 케이크 사진을 끝내 찾아내 자랑하더니 해맑게 웃고, 4대강 개발로 보금자리가 파헤쳐진 쑥부쟁이의 처지에 눈물이 난다고 고백한다. 감정을 부끄러워하거나 가공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순수한 바탕이 오랜 연륜으로 빚어져 사회경제 현안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을 게다.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이미 할 말 다했다거나 자신의 홈페이지(jkl123.com)를 보라고 했다. 거듭된 요청에 그는 예상 질문을 보고 판단하겠노라고 했고, 그의 저서를 키워드 삼아 만든 질문지에 “정성이 갸륵하다”며 수락했다. 지난달 말 찾아간 그의 서울대 연구실은 이사 준비가 한창이라 1시간 반 넘게 쪼그려 앉아야 했다. 올해 정년 퇴임한 그가 31년간 몸담은 교정에서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텅 빈 서재와 달리 그의 발언은 속이 꽉 찬 차돌마냥 거침이 없었다. “현 정부는 MB 정부 2기” “공공기관장 자리를 전리품으로 여긴다” “무상급식은 복지가 아닌 의무교육” 등 정부에 대한 쓴 소리가 쏟아졌다. “나이 들어 지식인이 침묵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자각” 덕에 시작했다는 자칭 ‘강남 좌파’의 목소리를 약속대로 그의 저서에 빗대 정리했다.
시장과 정부 “구호뿐인 경제정책, 무너진 시스템”
-정부가 앞장서서 최저임금을 포함한 임금 인상 화두를 던졌다.
“소득을 확충해 소비 심리를 자극하고 이를 통해 내수를 활성화하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책 방향은 옳다고 본다. 그러나 최 부총리에게 수단이 뭐냐고 묻고 싶다. 친(親)기업 기조를 유지하면서 임금을 올리려면 ‘어렵다’고 우는 소리 하는 기업들을 달래서 자발적 협조를 이끌어내야 할 텐데, 이를 실천할 수단도 청사진도 없다. 최경환호(號)의 경제정책은 구호만 무성할 뿐 정작 이뤄진 게 없다.”
-어떤 수단이 가능한가.
“답을 알고 있으면 벌써 (정계에) 진출했지, 백면서생으로 남았겠나(웃음). 누구도 뾰족한 답은 없겠지만 정부가 말만 하지 말고 기업 협조를 유도할 구체적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예컨대 중소기업이 사원 복지를 위한 지출을 하면 과감한 세액공제 혜택을 줄 필요가 있다. 물가상승률을 초과하는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정부가 부담할 수도 있고. 물론 세수가 다소 줄겠지만 정책 목표를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정부의 4대 구조개혁 방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공공부문 개혁을 하려면 공공기관장 자리를 전리품으로 여기는 정부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제일 위에 앉은 사람이 전문성도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개혁이 가능하겠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꼴이지. 노동개혁은 어려운 문제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효율성의 잣대로 보면 바람직하지만, 삶의 질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예컨대 미국 사람들은 유럽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경직된 것을 두고 ‘동맥경화증에 걸렸다’고 비웃는데, 뒤집어보면 유럽이 그만큼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효율성만 주장하지 말고 좀더 유연하게 사고해야 올바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 교수는 MB 정부 들어 사회적 발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까운 제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연구와 교육에 주력하는 것이 정도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지식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자각이 생겼다. 특히 MB 정부 들어서면서 ‘나라도 입을 열어야겠다’는 절박감이 있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MB 정부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4대강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눈물이 난다” “해외자원 개발은 바보가 아닌 이상, 말이 안 되는 무리수” “MB 정부의 개입주의가 국정 시스템의 붕괴 초래” 등.
-현 정부는 어떤가.
“MB 2기다. 근본적으로 개선된 게 없다. 삽질은 덜하지만 장관의 재량이 엄청 줄어드는 등 시스템이 무너졌다. 나는 케인지언(영국 경제학자 케인스 이론 동조자)이다. (시장 자율 기능을 중시하는) 시카고학파에 비하면 정부의 개입을 긍정하는 학파다. 하지만 MB 정부 5년을 경험하면서 케인지언의 신념을 많이 버렸다. ‘정부의 잘못된 개입이 이런 문제를 낳는구나’ 절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낙수 효과는 없다”
-한국경제가 수년째 2~3%대 성장에 머물고 있다.
“우리가 1950년대 이래 줄곧 경험해오면서 ‘정상적’이라고 여기던 높은 성장률은 사실 ‘비정상적’ 상황이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했듯 예수 탄생 이후 1,700년 동안 세계경제는 1인당 소득증가율이 제로 상태였다. 엄청난 규모의 투자 속에 고도 성장하던 시대는 갔다. 새로운 기술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은 물론 세계경제가 도약할 여지는 없다.”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부동산 경기 활성화가 곧 서민경제 살리기”라며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를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전형적인 낙수 효과(trickle down) 논리다. 물론 ‘묻지마 투기’가 성행하던 시절처럼 주택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른다면 아파트 건설 붐을 일으켜 경기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나드는 지금 그런 정책은 불가능하다.”
-한국은행 역시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계속 내리고 있다.
“금리 인하가 세계적 추세인 건 사실이다. 우리도 금리 인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정면 반박하고 싶진 않다. 다만 금리를 0.5%포인트 정도 낮춘다고 해서 우리 경제가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본다. 기업만 해도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서가 아니라 대상이 없어서 투자를 안 한다. 더구나 금리 인하는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갈 곳 없는 돈이 주택시장으로 몰려 집값이 들썩이거나 월세 전환이 가속화하는 건 서민 입장에서 정말 걱정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돈을 풀어야 돈이 흘러넘쳐 경제가 살아난다는 기대는 여전하다.
“허허벌판에 공장을 짓고 사람을 고용하는 고속성장 국면이라면 낙수 효과 실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투자과잉 상태다. 부자들에게 투자하라고 혜택을 줘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전될 채널이 없다. 신규 투자도 대규모의 자본집약적 투자이고 그마저도 해외에 많이 하다 보니 국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요즘 대기업이 투자는 늘리되 고용을 줄이겠다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다.”
그러면서 그는 얼마 전 만난 택시기사 얘기를 꺼냈다.
“택시기사 말이 한 달에 집에 가져가는 돈이 100만원을 조금 넘는다더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이라고 한숨을 쉬며 하는 얘기가, 서울시에서 얼마 전 택시요금을 올려줬는데 인상분의 80% 이상을 회사가 가져가고 자기들에겐 10~20%만 준다는 거다. 기사들의 복지를 향상시키라고 요금을 올려줬더니 결국 힘 있는 자들이 다 가져간다. 이러면서 어떻게 낙수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하겠나.”
-저성장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나.
“경기활성화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자칫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식의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럴 땐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낮은 성장률을 받아들이고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경제주체간 게임의 룰을 확립하고 공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갈 필요가 있다. 불황이 오히려 기회다. 지금 준비를 하면 나중에 더 올라갈 여지가 생긴다.”
℃ 인간의 경제학 “무상급식은 의무교육이다”
-홈페이지에 올린 칼럼에서 효율과 공평,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어느 한 쪽에 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지금은 실증분석을 통해 분배가 공평하게 이뤄진 나라일수록 성장률이 높은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는 등 경제학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성장과 분배가 손을 맞잡고 가는 면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립튼 세계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 역시 최근 방한해 그런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증세와 복지의 조합 방식을 둘러싼 논쟁 또한 가열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복지 과잉이라고 보지 않는다. 복지 정책을 확장해 나가려면 합리적 스케줄이 필요하다. 복지를 어떤 부문에서 어떻게 확대할지,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러다 거덜난다’는 얘기만 할 뿐 합리적 타임테이블(일정표)을 만드는 노력은 안하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무상급식 중단으로 선별 복지, 보편 복지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이나 아동보육, 출산장려는 보편복지로 가야 한다. 반면 빈곤계층 보조는 선별복지로 가는 게 옳다. 다만 나는 무상급식을 복지프로그램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건 의무교육의 일환이자, 우리 미래세대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이는 가치재다. 뭐가 아깝나. 그런데도 보수정치인들은 ‘무상급식 때문에 학교 변기 고칠 돈이 없다’는 식의 논리로 운영을 어렵게 만들어 국민들의 염증을 야기한다.”
-부잣집 아이까지 급식을 주느라 서민층에 가야 할 혜택이 부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지적이 있지 않은가.
“무상급식 예산을 증세를 통해 충당한다면 누진세율을 통해 부유층이 더 큰 부담을 지게 된다. 아이 밥값 50만원을 절약하는 대신 세금을 100만원 더 내는 셈이다. 이처럼 그림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선별’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무상급식을 하려면 당연히 증세를 해야 한다. 최소한 MB 정부 때 깎은 세금은 회복해야 한다.”
꽃보다 제자 “나는 복 받은 사람”
-30년 넘게 봉직했던 서울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했다.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팬클럽도 있다고 들었다.
“31년 간의 교수 생활을 대과 없이 마무리했다는 것이 보람 있고 감사하다. 젊은 학생들과 호흡한 시절이 너무 행복했다. 스스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사람 불러모으는 게 미안해 학과에서 열어주겠다는 은퇴식도 거절했는데, 얼마 전 제자 25명이 은퇴 기념 행사를 마련해줬다. 내 인형으로 장식된 케이크는 잊지 못할 선물이다.”
-제자들 주례 서는 일도 많은 걸로 아는데 어떤 조언을 해주나.
“전혀 다른 상황에서 성장한 만큼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얘기도 자주 한다.”
-교수님의 소소한 행복은 뭔가.
“결혼생활 38년간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반에 아내와 함께 장을 본다. 52에 38을 곱한 만큼 카트를 끌었다. 그게 너무 좋다.”
-스스로 강남 좌파라고 부르는 게 부담스럽지 않나.
“진보적인 정책을 부르짖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부유층인데도 부유층에 세금을 더 내라고 주장하는 게 강남 좌파다. 자신의 부담이 많아질 것을 알면서도 분배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별명이 ‘밀리어네어 래디컬’, 우리말로 갑부 과격분자였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는데 국회의원이 된 뒤 가장 급진적인 정책들을 내놨다. 갑부가 과격분자라니 얼마나 멋있나.”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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