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집권 전반부만 놓고 봤을 때 역대 가장 개혁적인 정권은 김영삼정부였다. 비록 피날레(외환위기)는 비참하기까지 했지만, 사상 첫 문민정부라는 도덕적 우월감 위에서 초반 행보는 정말로 드라마틱했다. 5ㆍ6공 핵심인사 구속,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도입, 그리고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단죄까지. 요즘 용어를 빌자면, 수십 년 적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국가를 완전히 새롭게 개조할 기세였다.
1995년 작성된 ‘김영삼정부 개혁총서’는 국가 개혁방향을 총망라한 마스터플랜이었다. 13권 총서에는 교육 사법 금융 행정 규제 통일 등 12개 분야별 미래비전과 세부 혁신과제들이 담겼다. 백화점식 나열에다 막상 실천된 건 별로 없지만, 어쨌든 국가 전 분야를 망라해 미래 개혁청사진을 제시한 건 이 때가 처음 아니었나 싶다.
12개 개혁분야 모두 파격적이었지만, 가장 뜨거운 감자는 재벌개혁 파트였다. 그룹기획조정실(비서실)의 법적 지위규정, 대기업 퇴출 용인, 오너에 대한 사법적 특혜배제, 소액주주 권한강화…. 지금은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대마불사의 신화가 지배했던 그 시절엔 재벌해체에 버금가는 혁명적 조치들로 받아들여졌다. 총서 시리즈의 제7권이었던 이 파격적 재벌개혁 보고서의 제목은 ‘나누면서 커간다’. 저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유승민 연구위원이었다. 지금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바로 그 유승민 이다.
지난 8일 유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연설문 전문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누면서 커간다’란 문구였다. 50분 분량의 긴 연설문 중 양극화 문제를 다룬 두 번째 단락 앞에는 ‘나누면서 커간다: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야’란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20년 전 본인이 썼던 재벌개혁 보고서의 바로 그 제목이었다.
새누리당의 기존 노선보다 훨씬 왼쪽으로 향해 있는 유 원내대표의 파격 연설을 놓고 여러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일단 두 가지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첫째는 소신이다. 박근혜정부를 사실상 정면 공격한 그의 연설을 두고 새누리당 친박그룹에선 “원내대표 아닌 개인의 견해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데, 그건 맞는 얘기다. 20년 전 카피를 다시 꺼냈을 정도이니, 연설 내용 모두 유 원내대표의 오랜 소신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원내대표가 개인 생각을 당론인양 포장했다면 정치적 시비거리는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유력 정치인이, 더구나 ‘키운 다음에 나누자(성장우선론)’는 정서가 팽배한 보수정당 안에서 ‘나누면서 키우자(성장-복지 동행론)’는 경제철학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경이롭다. 영혼 없는 철새의 낙원이 된 정치판인지라 신선함마저 느껴진다.
두 번째는 반성과 대안이다.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서민은 서민대로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심지어 대기업은 그들대로 모두가 불만인데, 국정을 책임지는 새누리당의 해법은 대체 무엇인지. 주로 야당을 탓하고 가끔씩 정부에 쓴 소리도 하지만 그들만의 비전과 대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 증세를 하자는 것도 말자는 것도 아니고, 무상복지를 그대로 하자는 것도 줄이자는 것도 아니고, 임금을 올리자는 것도 그냥 두자는 것도 아니고. 고집불통 정부 뒤에 꼭꼭 숨어서 야당의 헛발질을 즐기며 지난 2년여를 참으로 편하게 지내온 새누리당이다. 유 원내대표가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나마 지금까지 새누리당에선 이런 정도의 자기반성도 없었고 뭔가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모색도 없었다.
앞으로 새누리당 내 역풍이 더 거세지길 바란다. 친박-비박이 아닌, 정책과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대결 말이다.
(이튿날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연설문도 자세히 읽어봤다. 논란은 있지만 소득주도성장이란 새로운 경제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종래 야당대표에 비해 콘텐츠 있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대안의 선행조건인 자기반성은 없었다. 야당을 외면하는 국민들 앞에서 엄숙한 고해성사가 먼저 있어야 했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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